지금 이 자리에
숨이 멎고, 사랑이 멎고, 결심이 멎고.
그렇게 현실이 맞닿은 자리에서 나는 묻습니다.
물을 대상도 답할 대상도 결국은 나 자신뿐이지만,
물어야 할 질문을 용기 내어 계속하는 이유는,
적어도 나 자신에게만큼은 진실하게 살고 싶어서입니다.
지난 수요일엔 오래간만에 서울나들이를 다녀왔습니다.
보고 싶은 사람이 있어 지하철을 타고 다녀왔지요.
오래간만에 쐰 서울 공기에 가는 길은 자유로운 마음과 함께 설레었고,
돌아오는 길은 알 수 없는 마음과 함께 발걸음이 느려졌습니다.
이십 대 중반, 수없이 타고 내렸던 지하철 2호선과 분당선.
참 많은 희망을 품고 답답한 지하철 공기도 꾹 참아냈었던 지난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오래간만에 마주한 당신의 선한 모습 속에서
나는 다시 그 시절의 내 모습을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휘몰아치는 현재의 감정과 함께 지금의 나의 모습도 볼 수 있었지요.
나는 진실한 사랑을 믿습니다.
그리고 내게 주신 사명도 그와 같은 결로 나를 살게 한다는 사실을 다시 마주하였습니다.
나를 다시 살게 하는 것이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하루, 이틀, 삼일 밤을 나는 갈등하는 마음에 잠을 못 이루고 있습니다.
현실이라는 거대한 공기가 나를 휩싸기에 나는 그 가운데 다시 저 멀리 밀려나고 싶지 않아서
나를 붙들고 싶어 이렇게 견디며 한 자 한 자 기록합니다.
목요일, 하나뿐인 아들이 어린이집을 졸업하고 유치원에 초대받아 갔습니다.
학부모 오리엔테이션 자리에 앉아 나이가 지긋하신 원장선생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챗GPT에게 한 질문을 했는데, 이 시간 그 대답을 나누고 싶었습니다.
챗GPT에게 물었습니다.
'너와 나의 다른 점이 무엇이야?'
챗GPT가 답했습니다.
'당신과 나의 다른 점은, 당신은 사랑과 실패, 그리고 시간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사람이기에 사랑을 경험하고 실패를 경험하고 시간을 기억하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모두 자랍니다. 사랑하며 자라고, 실패하며 자라고, 그 시간들을 경험하며 자랍니다."
그렇게 원장 선생님은 내일과 앞으로의 시간들에 기대하는 마음과 함께 희망을 심으셨습니다.
어떤 대목이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 말씀을 듣는 동안 나는 마음이 뭉클해졌고, 조금 아프기도 했습니다.
지키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그 대상에 관하여 우린 '사랑'이라 부를 터이고, 지키지 못한다면 우린 그것을 '실패'라 말하겠죠. 그리고 그 시간들을 경험하기에 우린 앞으로 성장하며 나아갈 터이고, 뒤돌아보았을 때 그 시간들을 소중히 기억할 수 있겠죠.
'기억함'이란 단어가 아팠을까요.
사랑한 시간이 기억에 머무르지 않고 현재에도 진행되었으면 하는 바람에
그리고 그 바람은 나 혼자 애쓴다고 지켜지지 않는 것이기에 아픈 것인지
아파도 지켜도 되는 것인지에 관한 그 갈등이
내 머리 위로 그 무게의 감각을 알려주었지만.
나는 그래요.
내가 알게 된 건,
내 마음은 언제나처럼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인정하려 해요.
그리고 이런 내가 무색해지지 않도록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으로 오늘을, 하루를 살아가려 합니다.
내가 나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신이 나를 지으신 그 모습 그대로 나를 지킨다면, 나는 그것만으로 만족할 거예요.
그리고 무엇이라도, 내 소중한 마음을 가장 아름다이 고백할 수 있는 날이 오겠죠.
다음 주면 새 학기가 시작됩니다.
학업과 일을 병행하며 내 전공에 대한 그 순수한 마음을 지키는 것이 쉽지 않게 느껴지지만,
다시 한번 힘을 내서 사랑과 실패와 시간을 열심히 쏟아낸 그 공부도 다시 한번 사랑하려 합니다.
이렇게까지 손에서 놓이지 않고,
실패를 하고 와도 다시 한번 설레는 데에는
뜻도 있고 내일도 있겠죠.
다 없어도 괜찮아요.
지금 이 순간, 내가 여전히 사랑하고 있으니까요.
지난 수요일,
혼자 베트남 쌀국숫집에 들어갔습니다.
문을 열자마자 흘러나온 '사랑하기 때문에'라는 곡이 내 귀를 기울이게 했습니다.
좋아하는 곡이라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가
가게 주인 분들이 베트남분들이신 것을 보고
괜스레 이 감성을 함께 할 수 있다는 마음에 처음 간 곳임에도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그리고 나온 다음 곡은, 처음 듣는 곡이지만 이 역시 참 좋았습니다.
쌀국수를 먹다 노래를 찾아보니, '그대와 영원히'라는 곡이었습니다.
오래된 노래였습니다.
오래전 쓰였을 그 가사는 지금의 나에게도, 처음 보는 베트남 주인 분에게도 같은 감동을 주는 듯하였습니다.
육천 원의 쌀국수가 의도치 않은 위로가 되었습니다.
유치원 원장선생님께서는
집에 돌아가는 길에 '제라늄'이라는 꽃을 선물해 주셨습니다.
이 꽃에게 가장 중요한 건 햇빛이라 말씀하시며 빛 아래에 두라 하셨습니다.
꽃을 잘 키우지 못하지만, 제라늄의 꽃말에 깊은 여운을 꾹꾹 담아 키워보려 합니다.
빛 아래에서,
제 자리를 지키며,
천천히 피어나는 꽃처럼.
서로에게 빛을 비춰
우리의 한 해도 그렇게 피기를 기도합니다.
나는 늘 같은 자리에서
꽃을 피우며
사랑하며
변치 않는 마음을 지키며
그렇게 살아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