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도 나도 웬일로 계속해서 건강하게 지내던 요즘이었다. 시기별로 끙끙 대던 나도 아픈지가 오래되었고, 요즘 독감이 유행이라 주변 아기들이 모두 기침과 콧물을 달고 산다는 이야기를 매주 들으면서도 건강하게 크고 있는 아기가 대견하던 요즘이었다. 감사하다 생각하며 이번 겨울은 이렇게만 지나가면 걱정이 없겠다고 좋아하던 그 찰나, 방심의 틈을 타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평화로운 저녁, 나에게서 기침이 나오기 시작했다.
독감주사도 일찌감치 맞았던 터라 감기가 심해지지 않게 나는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병원을 갔다. 의사 선생님께선 지금 증상이 그리 심하지 않다고 약 먹으면 금방 나을 거라 말씀하셨지만, 나는 21개월 아기가 있으니 독감검사를 해달라고 굳이 말한 후 독감이 아닌 것까지 확인하고 약을 타서 집으로 돌아왔다. 친정에 전화해 SOS를 요청하고, 엄마와 오빠가 집으로 달려오자마자 나는 3일간 마스크를 끼고 방에서 격리 아닌 격리를 하며 아기에게만 옮기지 않도록 노력하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냥 감기라기엔 요즘 듣고 있는 독감의 증상대로 너무 아팠고, 목은 찢어질 듯하며 열은 계속 나고 기침은 사그라지지 않아 약을 먹어도 잠을 이루기 힘들 정도였다.
오랜만에 혼자 방에 누워서 감기와 싸우다 보니 몸도 마음도 약해져선 이렇게 달려와준 가족들이 너무 감사하고 소중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지난날을 차근차근 생각해 보니 아기가 태어난 후로 나에게 가장 많이 달라진 점은 가족에 대한 기본적인 정신과 마음이 변화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그저 받기만 하던 모든 것들이 조금씩 주는 것으로 바뀌기 시작했고 이전에 당연히 받아왔던 것들에 대해 당연히 여기지 아니함으로 어떻게든 감사함을 표하고 싶어 졌고 진심 어린 마음으로 가족의 안위를 바라게 되며 간절함으로 기도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아기에게서 조금 마음이 멀어져 나에게 집중을 하려던 또 한 번의 찰나, 감기가 다 나은 거 같다고 좋아하려고 방심하던 그 밤, 아기에게서 기침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날 밤과 새벽 아기는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불과 몇 시간 전 홀로 누워서 감사만 하던 내 모습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예민함과 불평이 솟구치며 아기가 아프다는 사실에 속이 상하기 시작했다. 병원에서 약을 타와도 잘 듣지 않던 아기 옆에서 우리는 세밤을 지새우며 아기를 간호했다. 엄마와 오빠는 본가로 내려가야 하고, 원래 일정이 잡혀있었던 시어머니와 아가씨가 바통을 이어받아 우리 집으로 왔다. 함께 좋은 시간을 갖자고 이전부터 짜놓았던 일정들은 모두 뒤로한 채 어머니와 아가씨는 나와 아기를 정성으로 보살펴 주셨다. 그렇게 저렇게 내 감기도 낫지 않고, 아기 감기도 떨어지지 않은 채, 독감은 아니지만 독감과 같은 그 심한 증상과 함께 우린 이 주간 힘든 싸움을 했고, 지금도 여전히 약을 먹으며 그 끝의 시간들을 견뎌내고 있다.
새해의 시작을 가족들의 보살핌에 둘러싸여 보내며 몇 가지 깨달은 것이 있다. 아무리 혼자 살려고 발버둥을 쳐도 우리는 모두 함께 하며 힘든 일들을 이겨내 가야 한다는 것이다. 걱정할까 봐,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아서, 힘든 일들을 꾹꾹 참으며 혼자 버티는 내 모습을 내려놓으니 일이 훨씬 수월하게 풀렸다. 그리고 더 중요한 사랑을 주고받으며 그 사랑의 열매가 우리 가정 속에 풍성하게 맺히는 것을 느끼게 된 것이다. 나 역시, 우리 엄마가 아빠가 오빠가 아프다면 달려가서 도울 것이고, 시댁식구들이 아플 때에 역시 발 벗고 나아가 힘을 합쳐 위기를 극복할 것이다. 우리의 보금자리를 적이 침투했을 때, 우리 모두가 힘을 합하면 함께 싸울 힘이 더욱 생긴다는 그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함께한다는 것이 비단 좋고 행복한 일만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위기 속에서도 새로운 지혜와 헌신 속에서 더 끈끈하게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생생하게 피부로 느끼게 되었다.
처음이었다. 아기가 아프면 이상하게 더욱 외로워졌었다. 더 잘 보살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내가 어떻게든 지켜내야겠다는 책임감에, 아픈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아린 안쓰러움에 나는 더욱 슬프고 외로웠다. 그런데 아기가 아파도 나도 아파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져버린 이번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가족들에게 손을 내민 내 손을 아무 말 없이 덥석 잡아 모든 것을 헌신해 준 모든 가족들의 사랑에 나도 아기도 회복을 하며 나는 아파도 외롭지 않았다. 아기가 아파도 걱정보다 더 큰 사랑으로 아기를 안아줄 수 있었다. 가족의 사랑이란 이런 것 같다. 아파도 아프지 않은 것. 슬퍼도 웃을 수 있는 것. 부하지 않아도 배부르고, 곤할 때에도 인내할 수 있는 것. 그 모든 사랑의 결이 흐르는 곳이 바로 우리 가정 안에서 존재하는 것임에 나는 참으로 감사하다.
신기하다. 당연한 말들이 당연하게 들리지 않을 때, 평범한 일들이 평범하게 다가오지 않을 때, 당연하고 평범한 우리 곁에 있는 가족들이 사실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귀한 보석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나의 심장은 가장 강하게 뛰는 것 같다. 인간이 망각의 존재라 뒤돌아서면 잊어버린다 한들 나는 우리 인간은 되돌아볼 줄 아는 살아있는 존재라 생각한다. 이렇게 당연한 것들 속에서 가끔가다 당연하지 않음을 깨닫는 지혜롭고 똑똑한 존재이기에, 또 이렇게 오늘 하루 주어진 일상을 아무런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저 주어진 대로 잘, 아주 잘, 평범하게 그저 잘 지내본다.
그러고 보니, 내가 아플 땐 늘 당연하게 엄마가 있었다. 네가 아플 때, 늘 내가 있는 것. 어쩌면 이것도 엄마가 되어가는 하나의 모습이지 않을까? 엄마에게 받은 그대로 너에게 주는 것, 다 나를 그리고 너를 사랑하는 엄마의 자리였다.
아기가 아파서인지 '엄마'만 부르며 내품만 찾는다. 나는 여느 때보다 더 자주 더 많이 아기를 안고 보듬어주며 약기운에 버둥대는 아기를 꼬옥 껴안아주었고 기도해 주었다. 아기의 숨결이, 감기에 지쳐 푹 잠든 지친 모습이 내 마음을 더 깨어있게 하고 또렷한 마음으로 그저 이 사랑을 고스란히 느끼고 전하게 한다.
사랑한다, 아가야. 늘 너와 함께할게.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만 커주기를 진정으로 바라. 사랑한다.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