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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희 Oct 23. 2024

따뜻한 봄날 아래 (8)

오늘 있었던 일로 충격을 많이 받은 제이미지만, 아무도 그녀의 곁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녀에게 ‘죽음’은 너무 낯선 것이었다. ‘죽음’은 그 사실만으로 격한 슬픔을 가져오기에 충분했다. 그녀는 그렇게 가장 큰 슬픔을 한 겹 덧대어진 현실 앞에서 경험하고 있다. 어제 품은 희망은 찰리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이는데 한결 더한 어려움을 안겨 주었고, 오늘 사람들의 태도는 그녀로 하여금 울분을 터트리게 하였다.


그녀는 슬펐다. 자신이 바랐던 소식이 아닌 생각지도 못한 찰리네 소식이 계속 찾아오는 것도, 채워지지 못한 모금함도, 찰리네를 깊이 생각하지 않는 이웃들의 무정함도 너무나 슬프게 느껴졌다. 찰리네 남은 가족이 이제는 다 같이 행복하게 살기를 바랐다. 그런데 이제는 찰리네 엄마마저 떠나버려 잡화점 아저씨는 혼자가 되었다는 생각에 아저씨가 걱정되었지만, 한편으로 이러한 아저씨에 대한 걱정은 조금도 하지 못한 채 모금을 할 이유가 없다는 말만 하는 사람들의 태도에 되려 화가 나기 시작했다.


건강해 보였던 이웃 가족들이 모두 병든 가족처럼 느껴졌다. 사람들의 민낯을 본 것 같아 그들이 느껴야 할 부끄러움을 자신이 느끼는 것 같았다. 아빠는 왜 다 같이 모금을 하자고 하셔서 이런 모습들을 보게 했는지 아빠에게 마저 화가 났다. 좋은 사람들이기에 좋은 일에 모두 동참할 거라는 아빠의 말이 이상적인 말일뿐이라는 것을 제이미는 깨달았다. 어린 제이미의 마음으로는 이 시간을 감당하기엔 너무 버거웠다. 한참을 울다 잠든 제이미가 자정이 되어 눈을 떴다. 아까 있었던 일이 꿈이 아니며 현실임을 안 제이미는 세수를 하고 책상에 앉았다. 이성적으로 현실을 생각해 보니 잡화점 아저씨가 마음에 걸렸다. 누구보다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아저씨가 내일 정산해야 할 수술비가 충분하지 않아서 충분히 슬퍼해야 할 시간마저 슬픔보다 걱정으로 힘들어하진 않을까 제이미는 마음이 쓰였다. 그리고 1층으로 내려가서 모금액을 확인해 보았다.


첫째 날 모금액 73만 원.


둘째 날 모금액 159만 원.


합계 232만 원.


최소 500만 원이 필요하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반도 못 채워진 금액이다. 기대와 현실이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확 와닿는 액수였다. 제이미는 이 남은 금액을 자신이 채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큰 금액이 자신에게 있는지 고민하며 한 계단 한 계단 자신의 방으로 올랐다. 생각보다 적은 모금액수에 허탈한 마음을 가지고 제이미는 침대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돈을 다 합칠 생각을 해보았다.


얼마 들어 있지 않은 저금통, 집안일을 도와주며 모아뒀던 빨간 통의 돈 그리고 지갑에 있는 돈까지 모두 모아 보았다.


7000원. 166,000원. 28,000원.


합계 201,000원.


제이미의 전재산은 이십만 원 정도 된다. 그녀의 한숨소리가 새벽 깊은 시간에 나지막이 울려 퍼졌다. 그녀는 눈을 감고 한참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는 생각해 냈다. 그녀에게 큰돈이 있음을.


책상 위 선반에서 꼭꼭 숨겨둔 빨간색 일기장을 꺼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부터 중학교 내내 썼던 제이미의 소중한 일기장이다. 이 일기장에 그녀는 특별한 날을 기록해 두었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 꽂혀 있는 두툼한 봉투를 꺼냈다. 제이미의 아빠는 학교에 입학하고 제이미가 100점을 맞을 때면 특별한 파티를 하며 10만 원씩 직접 봉투에 넣어 선물해 주셨다. 대신 그 돈은 지금 쓸 것이 아니라 모아뒀다가 성인이 된 후에 정말로 하고 싶은 것을 하라는 약속을 하고선 말이다. 가끔가다 친척들에게 받은 큰 용돈까지 함께 모아놓았더니 봉투가 제법 두꺼워졌다. 제이미는 이 돈을 모아 대학교 첫 등록금을 스스로 내고 싶었다. 꾹꾹 모아 담은 소중한 돈을 조심스레 열어보았다. 그리고 정확히 얼마인지도 모르는 낡은 봉투의 돈을 한 장, 두 장, 꼼꼼히 꺼내어 세어보았다.


250만 원.


‘됐다!’ 제이미의 얼굴에 환한 웃음꽃이 피었다.


새 봉투를 꺼내어 모든 돈을 소중하게 넣었다. 시계를 보니 새벽 두 시 반이 다 되었다. 제이미는 잠 잘 채비를 먼저 하고 마지막으로 봉투를 두 손으로 가슴에 품은 채 앉았다. 어제 있었던 일들을 하나하나 되새겼다. 그리고 오늘 있을 일들을 생각해 보았다. 어제는 너무 슬펐고 오늘은 슬플 예정이다. 제이미의 눈에 금세 눈물이 맺혔다. 홀로 남은 잡화점 아저씨는 부디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자신의 전재산이 담긴 봉투를 가지고 조심조심 일층으로 내려갔다. 모금액 기록부에는 자신의 이름을 적지 않은 채 모금함에 소중한 봉투를 집어넣었다.


그날 밤, 별들이 유난히 반짝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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