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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엘 Sep 29. 2023

결혼하지 않으면 그냥 있는 거다.


"그 집 얘들도 그냥 있고, 결혼들 안 해서 큰 일이야"


어머니 얘기다.

명절이다. 하지만 이 얘기가 명절에만 나오는 얘기는 아니다.


어머니는 사회생활 한번 해보지 않은 전업주부로 평생을 살아오셨다. 사촌에 팔촌에 그 팔촌의 사촌의 팔촌들도 모두 한동네에 모여 살았던 시대. 어머니는 그 시대에서 거의 씨족사회나 다름없는 환경에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내셨다.  


요즘도 날 만나 어머니가 하시는 이야기들 중 90% 이상은 모두 그 사촌의 팔촌들에 관한 것 들이다. 어머니에게 친척들은 가족이자 친구들이었고, 인생의 거대한 맥락이자 수많은 스토리들인 거다.

 

어머니에겐 소중한 분들이겠지만, 나에게 까지 그렇진 않다. 평생을 들었어도 하도 많아서 누가 누구인지도 잘 모른다.


아버지 소천하시고, 홀로 되신 어머니는 과거보다 더욱 그 친척들 이야기를 많이 하신다. 옛날이 그리우신 거다. 그리워하시는 방법 중 하나가 바로 누구네 자식들의 결혼 유무를 이야기하는 것!


"누구네 자식들이 모두 그냥 있다. 그렇게 있으면 어떡하냐."


그냥 있다는 말은 결혼을 아직 안 했다는 뜻.

비교적 일찍 결혼을 했으니 다행이지, 내 결혼이 늦어졌거나 아직 안 했다면 나는 어머니의 거대한 골칫거리가 되었을 거다.


"어머니, 그래도 친척들 만나는 자리에서는 그리 말씀하지 않으시는 게 좋겠어요. 결혼 안 했다고 그냥 있는 건 아니잖아요."


좋게 이야기를 드려봤지만,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다.


"그냥 있으면 어떡하냐. 그렇게 그냥 있어서.."


나는 현재 우리나라 혼인율과 출산율들을 예를 들어가며, 어머니를 다시 타이른다.

 

"요즘 젊은 세대들 결혼하고 싶어도, 못하는 경우도 많아요. 저희 때와는 또 달라요. 결혼이 선택이라는 풍조와 문화도 한 몫하고 있고요. 사람마다 배경과 생각이 다르니까... 어머니 생각과 다를 수 있어요. 그러니 어르신들 만나면 웬만하면  좀..."


"그래도 그냥 그렇게 있으면 어떡하냐.."


도르마무다. 네버엔딩 스토리.

나는 단념한다.






명절이 싫었던 적이 많았다. 별로 보고 싶지 않은 친척들 얼굴 보는 일, 어르신이라는 이유로 함부로 말하는 것을 참는 일, 비교되는 일, 갑작스러운 존경을 요구받는 일 등..

 

하지만 나는 결혼을 한 후, 어른 대접을 받는 느낌을 받았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결혼 전과는 확실히 대우가 달랐다.

큰 아이를 출산하고 나서는 웬만해서는 막말도 들은 적이 없다. 얘 아버지라는 푯말이 붙어서였을까.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고 유지하는 일이 만만치 않음을 친척들이 알아서일까.

얘 낳아서 키우는 일이 녹록지 않은 세상을 사는 가장이어서 약간의 존중을 받은 것일까.


'결혼했고, 자녀가 있으면 어른인거지'


친척들 중 어느 분의 이 말을 듣고 한동안 생각에 잠겼던 적이 있었다.

이 말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나와 나의 삶을 성찰해 봄직한 메시지가 되어주기도 한다.




명절이다.  요즘은 명절이 좋다. 나이가 들수록 가족 친지들도 익숙해지고 관계에서의 편안함이 있다. 무엇보다 아내와 오붓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좋다.


어제와 오늘 오전까지 바빴지만, 오후에는 아내와 한적하게 인근 카페에 가서 차 한잔 할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아내는 내가 가장 친한 친구라고 말했다. 극찬 아닌가.

아내도 나이 들어가며 나와의 관계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듯하다.


차와 빵 몇 조각을 주문하고 나란히 앉아 마음의 이야기들을 주고받는다. 많이 힘들었던 삶 속에서 깨달은 지혜들을 공유한다. 생각해 보니 나는 편해진 지 몇 년 되지 않았다. 삼십 년 이상이 힘들고 어려웠던 기억들이 가득하다.


잘 버텨냈다며 앞으로는 더 좋아질 거라고 말해주는 아내의 넉넉한 응원에 마음이 몽글몽글 해진다.



'결혼하지 않음, 그냥 있는 거다. '라는 어머니의 도르마무 메시지는 때에 따라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의 나를 비춰보면, 그냥 사랑하는 사람 생겨서 결혼했던 것뿐이었는데-

뭔가 큰 일 해낸 듯한, 큰 산을 넘은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지 않았다면 지금 나는 어떻게 하고 있었을까.

어머니 표현대로, 그냥 있었겠구나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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