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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은 May 14. 2018

결과는 마라톤 완주

다리의 파업 선언, 그래도 달리자

다양한 버킷리스트가 있다. 캐나다에서 메이플 시럽 채취하기, 프랑스 파리에서 훈남과 카페 가기, 제주도 스쿠버다이빙부터 스페인 순례길, 세계 일주같은 것. 마라톤 역시 내 버킷리스트다.


16년도에 미즈노 릴레이 마라톤이 SNS에서 핫했다. 남녀 2인씩 4인이 한 팀으로 12km를 4구간으로 나눠 팀원의 최고기록을 더 해 팀 기록으로 겨루는 방식의 마라톤이었다. 홈페이지의 팀원 모집 게시판에는 "남2인데 여2 구해요!" "여2, 처음인데 괜찮을까요? 같이 뛸 남자분들 구해요." 등 소개팅 방불케 하는 남녀 팀원 모집 글이 올라왔다. 나 역시 동성 친구와 남자 크루를 찾아보고자 팀원 모집 게시판에서 연락처를 얻어 연락을 했다. "이미 구했어요. 죄송해요." "팀이 하도 안 구해져서 출전 포기했습니다." 다양한 이유로 거절당하고 의욕 상실. 마라톤 목표는 내 마음 어딘가로 숨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웃 블로그에서 10km 마라톤 완주한 글을 읽게 되었다. 평소라면 지나칠 글이 나를 자극했다. 5월 마라톤 검색을 했다. 가장 빠른 마라톤이 2주 뒤였다. 괜찮을까, 한번도 달려본 적 없는데. 걱정에도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등산, 트레킹을 같이 하던 아빠, 쇼파에서 뒹굴거리던 동생, 회사에서 일하던 언니 등 온 가족들의 참여 도모를 꾀하다 아빠와 출전을 하기로 했다.


다음날 바로 10km 훈련에 돌입했다. 8km, 10km씩 4일간 매일 달렸다. 처음엔 발목과 종아리가 아프고, 물을 마시려고 멈추면 어지러워 훈련 방식이 맞나 싶었다. 폭풍 검색에 돌입했다. "러닝 전에 커피를 마시면 좋다." "뛰기 전엔 탄수화물, 나서는 근손실을 방지하기 위해 단백질 섭취"등의 조언을 얻어 다시 힘을 낸다. 어지러운 것도 갑자기 멈춰서 그런 거란다.


첫 기록은 8km 러닝에 1시간 20분이었다. 완주는 할 수 있겠구나 안심했다. 다음은 10km 1시간 30분. 대회 3일 전 새 러닝화를 샀다. 러닝으로 가장 평판 좋은 신발인데 과연 1시간 완주가 가능할까? 포텐을 터뜨리자! 새 러닝화로 기록이 단축되었다. 내 목표는 1시간, 점점 다가가고 있다.


그런데 대회 전날, 비 소식이 들려온다. 마라톤 참가자 전원에게 우의를 제공한다고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대회 당일이 되니 비가 생각보다 많이 내린다. "아, 망했다." 배 번호를 받았는데, 배 번호가 1984다. 요즘 마라토너들 사이에서 '펀런'이라는 단어가 유행이다. 물론 프로는 기록이 중요하겠지만, 아마추어는 기록보다는 즐겁게 달리자는 거다. 그런데 초짜는 그저 긴장이다.


대회 시작 전 MC가 참가자들을 무대 위에 올려 댄스 배틀, 게임 등을 했다. 트레이너 겸 배우의 5분 스트레칭후 드디어 9시 24분에 선발대가 출발했다. 나도 이제 NRC 어플 시작 버튼을 누르고 달린다. 그나저나, 참가자 몇 백명이 우의 입고 달리는 모습이 장관이다. 아스팔트 길을 지나 1km 달렸음을 알리는 입간판이 보인다. 3km 지점에 다가오자 숨이 가빠져 걷기 시작하는데, 나를 두고 쌩쌩 지나 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자니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다시 달린다.


진흙탕 길에 돌입.  나의 새 신발은 점점 흙탕물 색이 되어 간다. 드디어 저 멀리 반환점이 보인다. 걸리적거리던 우의를 벗어 버리고 기록을 확인하니, 30분 53초 놀라운 기록이다. 60분이 불가능은 아니겠다. 가벼워지니, 달리기에 가속이 붙었다. 조금씩 옆 사람을 추월한다. 턱은 바짝 당기고, 시선은 10-15m 앞에. 마라톤은 나와의 싸움이라는데, 그래도 주변에 같이 달리는 사람들이 선의의 라이벌이 된다. 


급수대에서 종이컵에 담긴 물과 스포츠음료를 마신다. "화이팅!" 교통 정리 봉사자들의 응원이 은근 힘이 된다. 자신의 한계를 극복할 때 느낄 수 있다는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는 없었지만 계속 달리는 내 정신은 고양된다. 7.78km 즈음 6' 13"/km의 페이스다. 기록 측정 어플을 확인하려고 걸음을 늦춰 핸드폰을 켜는 동시 핸드폰이 빗물과 함께 사망하셨다. 맙소사.  


나의 신기록이 기록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과, 완주를 인증받을 수는 있는 건가 싶은 마음이 들며 타오르던 의욕도 조금 가라앉고 있다. 무섭게 달리던 다리가 파업 선언을 한다. 머리는 마음과 다리에게, 그럼에도 앞으로 나아가라고 다독인다. '기록 안 되면 어때, 너 자신이 알잖아.'


인증받는 삶만을 바라보지 않았다. 대학에서 캘리그라피 소모임을 할 때도, 언니가  왜 취업에 도움이 되는 공모전이나 대외활동을 하지 않느냐고 꾸지람을 준 적이 있었다. 그래도 나는 좋아하는 것을 하는 것이 비록 인정을 받지 못하더라도 가치 있는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달렸다. 저 멀리 출발점이자 피니쉬 라인이 보이기 시작했다. 집 근처 강변에서 훈련을 할 때도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울컥한 감정이 몰려왔다. 순간 이런 감정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내 삶에 이런 순간이 있었던가. 도착하자마자 처음 보이는 여자분께 시간을 물어봤다. 핸드폰 시계가 가르키고 있는 건 10시 25분이었다. 내 기록은 딱 1시간 1분이었다. 비록 비공식적 기록이었지만, 목표했던 1시간에 고뇌한 1분을 더한 기록이라 생각되었다.


그 때 희열과 내 자신에 대한 감동이 들었다. 끝까지 달리길 잘 했다는 마음도 들었다. 파업 안 하길 잘했다

  

두 시간 안에만 완주하겠다던 아빠도 1시간 20분 안에 도착했다. 부녀는 비를 피하며 경품이 가득한 행사장을 뒤로 하고 유유히 떠났다.




인생이 마라톤이다.

라는 말이 달리면서 문득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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