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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굳이, 0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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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이 Oct 14. 2023

피할 수 없는 슬픈 일들

Incheon, KR

최소 한 달에 한 번은 하는 인천비행. 정 없이 딱 하루만 있다 돌아가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알찬 24시간을 보낸다. 몇 달 전 피부과 제모 5회권을 끊었다. 고작 피부과 방문인데도 하루만 있다 가는 아쉬움이 꽤나 달래진다. 아마 미국에 비해 가격이 매우 저렴해서 그런 게 아닌가 싶다. 아침식사 후 부지런히 움직여 피부과, 서점, 다이소를 연달아 들렸다. 대중교통을 이용해 호텔로 돌아가면 45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책을 한 아름 샀던 터라, 역까지 걸어가 지하철을 타고 다시 호텔로 걸어갈 자신이 없었다. 호텔을 나설 땐 선선한 가을 날씨인가 싶었는데 아직 여름이 가시지 않아 더웠다. 택시를 불렀다. 미국 버전 카카오택시인 ‘우버’를 사용했다. 기사님이 배정되었고 ‘순애 is coming’이라는 알림이 떴다. 여자분이신가 보다 하고 골목어귀 그늘을 찾아 섰다.


잠시 후 택시가 도착했다. 문을 열고 뒷좌석에 앉자마자 외할머니 냄새가 났다. 우이동 할머니 집에 가면 나던 냄새. 잠깐 졸다 가라고 펴주신 할머니 방 이불에서도, 편하게 입고 먹으라며 꺼내주신 할머니 고무줄 바지에서도, 집에 가는 길 춥다고 목에 둘러주시던 할머니 마후라에서도 나던 그 냄새. 그제야 바라보니 몇 년 전 할머니와 똑같은 뽀글뽀글 파마머리를 하신 기사님이 손에 흰 면장갑을 끼고 운전대를 잡고 계셨다.


외할머니는 최근 몇 년 전부터 치매를 앓고 계신다. 할머니는 더 이상 길치인 나를 마중 나오지도, 예전처럼 요리도 못해주신다. 그래도 정성으로 보살펴 주시던 이모의 사랑으로 진행속도가 더뎠었다. 그런데 그날 아침 엄마에게 외할머니를 요양원에 모셔야 할 것 같다는 소식을 들었다. 단 몇 시간이라도 혼자 계시는 게 위험한 상태라고 하셨다. 나는 할머니를 케어할 수도,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지원을 해드릴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사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할머니 집이 사라지는 게 너무 서글펐다. 할머니 댁에 가서 할머니를 만날 수 없는 게 벌써 슬펐다. 한국에 나오면 하루 이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베짱이처럼 할머니 옆에서 하루 다섯 끼씩 먹는 그런 날들은 이제 없다. 부지런히 신랑감 찾으라며 내 연애 사업을 걱정해 주던 할머니도, 사진 찍을 때 소녀처럼 웃으며 손을 꼭 흔들던 할머니도, 할머니의 고무줄 바지와 마후라도 이제 없다. ‘외할머니 댁‘이라는 단어가 사라지면 많은 것들이 사라지겠구나. 아침에는 덤덤했던 마음이, 택시 타고 가는 이십 분 내내 괜찮지 않았다.


꺼내고 싶지 않던 죽음이란 단어를 생각한다. 내가 나이가 들어 엄마 나이가 되면 할머니가 아니라 엄마의 죽음을 준비해야겠지. 하루하루 시들어가는 꽃을 바라보는 것처럼, 정해진 이별을 상상한다. 이 모든 것을 의연히 받아들여야 하는 어른으로써의 의무가 참 두렵다. 나는 그 어느 것 하나 준비되어있지 않은데 어느 순간 코앞까지 다가올 것 같아 무섭다. 그렇게 두려움과 슬픔 속에 머리끝까지 잠겨있느라 잊고 있던 사실이 떠오른다. 죽음이 끝이 아니지. 영영 이별이 아니지. 그곳에서 다시 만날 날을 기대하며 우린 또 하루하루 살아가는 거지. 그때 그곳에서 만났을 때 슬픔도, 아픔도, 다툼도 없는 채 다시 만날 거지.


삶은 여행이다. 누군가에겐 짧기도, 누군가에겐 끝이 없을 것처럼 길기도 한 여행이다. 삶을 살고 있는 우린 모두 여행을 선물로 받았다. 대가 없이 주어진 이 선물을 어떻게 바라보며 살아야 할까. 희로애락 (喜怒愛樂)이 골고루 담겨 있는 시간 속 한쪽으로만 치우쳐지지 않게 끊임없이 환기시켜 주는 것. 슬픔이 나를 뒤덮을 때, 숨겨진 기쁨을 찾는 것. 즐거움 속 잊힌 누군가를 생각해 내는 것, 분명히 있지만 보이지 않는 행복, 자유, 사랑, 소망을 볼 수 있는 시야를 넓히는 것. 그리고 내가 채워졌을 때 넘치는 사랑을 간직만 하지 않고 흘려보내는 것. 그렇게 살아갈 때 우리는 그 끝에서 좋은 여행이었다, 이제 집에 가도 되겠다고 고백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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