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dney, NSW
나는 길치다. 그것도 방향치까지 더해진 심각한 길치. 한두 번 가본 길은 당연히 기억 못 하고 몇 달 동안 다녔던 길도 꼭 네비를 찍고 간다. 운전하기도 바쁜데 어떻게 길을 다 기억하라는 건지. 길눈이 밝은 우리 언니는 날 보며 어떻게 이 정도로 길치일 수 있을까 하며 신기해한다. 하지만 나는 좀 억울하다. 같은 길이어도 해가 져 어두울 때와 밝을 때, 비가 오거나 눈이 쌓여 풍경이 바뀌면 달라 보이는데…
걸어 다닐 때도 마찬가지다. 어떤 건물에 들어가 볼 일을 보고 나왔을 때, 내가 어느 방향으로 걸어오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오른쪽으로 향해야 하는지 왼쪽으로 향해야 하는지 바로 알 수 없다. 주변 풍경이 너무 낯설다. 침착하게 기억을 더듬을 시간이 필요한데, 마음이 급할 땐 그냥 바로 GPS의 도움을 받는다. 길치들은 운전할 때만 아니라 걸어 다닐 때도 구글맵을 꼭 켠다. 알려주는 대로 우회전, 좌회전…
몇 달 만에 호주 시드니 비행을 다녀왔다. 집으로 돌아가는 날, 시차 때문에 새벽 일찍 눈을 떴다. 보통 이렇게 시차가 나는 도시에 올 때면 컵라면 같은 비상식량을 든든히 챙겨 오는데, 세관이 엄격한 나라인 만큼 번거롭기 싫어서 챙겨 온 게 없었다. 카페는 일찍 열지 않을까 싶어 5시가 조금 넘었을 때 구글맵을 펼쳐봤다. 호텔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빵집 하나가 열려있었다. 핸드폰과 지갑만 챙겨 바로 방을 나섰다.
가까운 거리지만 위치를 모르니 당연히 구글맵을 켠 채로 출발하려 했다. 신호가 약해서일까? 로비에서 나오자 GPS가 현재 내 위치를 잡지 못하고 빙글빙글 돌더니, 한 30마일은 족히 떨어져 있을 것 같은 바다로 내 위치를 인식하고 있었다.
호텔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가야 하는지 왼쪽으로 가야 하는지, 한쪽은 오르막길이고 한쪽은 내리막길이라 더욱 신중하게 발걸음을 떼야했다. 길 이름을 보려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다. 너무 이른 시간이라 길을 물어볼 만한 사람도 없었다. ‘뭐 걷다 보면 알려주겠지’ 하는 마음으로 오르막길을 향해 걸었다. 가만히 멈춰 있을 때는 응답이 없던 GPS가, 한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니 길 안내를 시작했다. 맞는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종종 잘못된 지 모른 채 반대 방향 또는 멀리 돌아가는 길로 가고 있을 때가 있다. 그럴 땐 가던 방향 그대로 조금만 더 움직이면 얼마 지나지 않아 방향을 틀어야 한다고 알려준다. GPS에게 조금의 여유만 주면 된다.
길치에게 길 찾는 일만큼, 살다 보면 어려운 일이 참 많다. 그중 가장 도전적인 순간은 ‘내가 가는 이 길이 맞나?’라는 불확신과 권태로움이 나를 덮칠 때인 것 같다. 하지만 그 순간이 왔을 때, 멈춰 서서 두리번거리기만 하면 알 수 없다. 해왔던 그대로, 그 페이스대로 조금만 더 하다 보면 알 수 있게 된다. 그대로 계속하면 좋을지, 잠시 멈춰 서서 점검을 해봐야 할지 아니면 방향을 바꿔야 할지.
내게 필요한 건 GPS를 무한신뢰하듯 내 삶을 이끄는 그 어떠한 사랑의 힘을 신뢰하는 것. 그리고 그 찰나에 도달하기까지 꾸준함을 잃지 않게 해 줄 ‘몸과 마음의 근력’을 기르는 것.
지나가는 사람 하나 없는 이 거리의 새벽은 참 고요한데, 내 마음은 새로운 깨달음 때문에 요란스럽다.
까먹기 전에 얼른 적어 둬야지라는 생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