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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이 Feb 14. 2023

스스로에게 솔직하기, 쉽지 않다

London, UK

작년 12월, 스케줄이 나오기도 전 다짐한 게 있었다. 이왕 일 하는 거 낭만적인 도시에서 크리스마스를 느끼고 와야겠다는 다짐이었다. 내 비장함이 먹혔던 걸까. 크리스마스이브 이틀 전 런던으로 출발해 40시간 레이오버 후 돌아오는 비행을 하게 됐다.


제대로 된 유럽 여행은 해 본 적도 없고, 유럽 비행도 자주 하지 않는 나에게 '크리스마스 런던 비행'은 가슴 꽤나 벅찬 일이었다. 비행 스케줄이 확정된 이후로는 인스타그램, 네이버, 유튜브 브이로그 등 모든 채널을 동원해, 남들은 런던에 가면 뭘 하는지,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뭘 사 와야 하는지, 뭘 먹고 어디서 어떤 사진을 찍어야 하는지 차곡차곡 계획을 세웠다. 유튜브에 '크리스마스 런던 레이오버'라는 제목으로 영상도 올릴 생각이었다.


밤새 열심히 날아 런던에 도착했다. 호텔 방에 들어오니 오후 2시경. 계획대로 간단히 씻고 알람을 맞춘 뒤, 두 시간 후에 일어났다. 너무 피곤해서 계속 자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유튜버가 아니던가? 무려 크리스마스 런던 비행인데 그럴 순 없지. 억지로 몸을 일으켜 준비 후 호텔을 나섰다. 틈틈이 영상과 사진을 찍으며 일정대로 움직였다.


계획대로라면, 저녁 식사 후 LUSH가게에 들러 쇼핑을 해야 했다. 그런데 기차역 안으로 귀여운 패딩턴 가게가 보였다. 일정에 없던 그 가게에서 한참 시간을 보내고 호텔에 돌아왔다. 씻고 침대에 누웠을 때 문득 패딩턴 영화가 떠올랐다. 몇 년 전 봤던 영화인데, 어린 곰 패딩턴이 고향을 떠나 런던에서 정착하는 이야기였다. 홀린 듯 티비를 켜고 넷플릭스에 검색해 보니 영화가 있었다. '지금 당장 잠들어서 내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지! 그 스콘가게에 가봐야지! 웨이팅이 길다고 했잖아!'라는 마음의 소리를 무시한 채, 영화를 시작했다. 영화를 다 보고 나니 '여기까지 와서 왜 넷플릭스를 봐? 런던에서만 할 수 있는 걸 해야지!'라는 질책하는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다시 본 영화는 너무나 재밌었고 ‘나도 모르겠다’라는 마음으로 패딩턴 2까지 보고 말았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서 웨이팅이 어마무시하다는 그 스콘가게에 갔어야 했는데…


해가 뜨고 잠이 들었으니 (게다가 그전 날도 거의 잠을 못 잤으니) 아침은 고사하고 점심시간도 한참 지난 시간에 눈을 뜨고 말았다. 지금이라도 가보자라는 마음으로 오후 4시가 넘어서야 스콘가게에 도착했다.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가게 외관과 창 너머로 보이는 스콘은 실제로도 맛있어 보였다. 어둑해지기 시작했는데도 방문객이 많았다. 역시 유명한 곳은 다르네, 오길 잘했다!라고 스스로 위로했다. 다른 관광객이 최대한 나오지 않게 사진과 동영상을 찍으며 내 순서를 기다렸다. 혼밥은 익숙하지만, 내가 혼자 테이블을 차지하긴 미안해 주문받는 직원에게 괜찮겠냐 물어봤다. 흔쾌히 괜찮다고 하기에 기쁜 맘으로 주문 후 테이블에 앉았다.

한참 기다린 후 스콘과 홍차가 나왔고, 스콘을 반으로 갈라 한입 먹었다. 잘린 스콘 면이 까맣게 변해있었다. 사용한 칼을 보니 칼날 틈새에 더러운 때가 잔뜩 묻어있었다. 나는 비위가 정말 강한 편인데 이건 도저히 먹고 싶지 않았다. 직원에게 컴플레인을 걸고 싶지도 않았다. 사실 난 그 긴 줄을 기다리며 이미 지친 상태였다. 갑자기 호텔 방으로 돌아가 셜록홈스나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브이로그용 영상도 그만 찍고 싶었다. 이후 일정이었던 크리스마스 마켓에도 가고 싶지 않았다.


영상을 찍던 핸드폰을 가방에 넣고, 남은 스콘과 차를 뒤로 한 채 카페를 나섰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나는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여행을 하고 있는 게 맞았다.  남들이 다 가는 곳에 가서 인증샷을 남겨야 한다는 어리석은 강박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지도를 펼쳐보다 근처에 셜록홈스 박물관이 눈에 띄었다. 베이커가에 위치한 귀여운 박물관이었다. 그곳에 가서 셜록홈스 소품을 잔뜩 구경하고, 마음에 쏙 드는 뮤직 박스를 구매한 후 호텔로 돌아왔다. 그리고 호텔 침대에 누워 넷플릭스를 다시 켰다.


정말 맛있는 스콘을 먹어보고 싶었던 건지, 남들 다 가는 유명한 스콘가게에 가는 내 모습을 그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건지 생각해 봤다. 그리고 앞으로는 전자일 경우에만 그게 어디든 가고, 먹고, 사자고 다짐했다.


은근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 있다. 바로 '나' 스스로에 관한 질문을 받았을 때. 최근엔 오랜만에 만난 사촌동생이 이런 질문을 했다.

(동생은 한국말이 서툴다.)

"누나, what do you do for fun?"

그 질문은 내 머릿속 한국어 필터를 통과해 '쉬는 날 주로 뭘 하며 시간을 보내나요?'라는 질문으로 내게 돌아왔다.


이런 질문이 어려운 이유는 아마 내가 어떻게 여가시간을 보내는지 조차 누군가에게 도전과 영감을 주고 싶다거나, 혹은 단순히 ‘그럴싸해’ 보이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가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 잠깐 고민하다가 그냥 말했다.

나 그냥 집에서 혼자 놀아. 넷플릭스 보거나 뒹굴뒹굴 해. 나띵 스페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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