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배추구이
며칠 전부터 배추전이 너무 먹고 싶었다.
어느정도였나면, 비행을 하다가 빡침 모먼트가 생길 때마다 집에 가서 먹을 배추 전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실제로 마음이 진정된 걸 보면 정말 먹고 싶었나 보다.
인터넷에 알배추구이라는 이름으로 돌아다니는 레시피를 찾아본 후, 랜딩 하자마자 한국마켓으로 달려갔다. 마감 시간이 가까워와 혹시 배추가 다 떨어지지 않았을까 조마조마한 마음을 애써 달래며 차를 몰았다. 다행히 배추가 있었다. 졸였던 그 마음이 민망할 만큼 아주 많이 쌓여 있었다.
배추를 카트에 담고 계산대로 향하던 중, 마켓 내 핫도그 가게에 발걸음이 멈췄다. 9시가 넘은 늦은 저녁, 바삭한 튀김옷과 짭조름한 소시지가 날 유혹했지만 핫도그를 먹으면 그렇게 애달프게 기다렸던 배추구이가 덜 맛있을까 봐 꾹 참았다.
집에 오자마자 후다닥 늦은 저녁으로 해 먹었는데 역시나 맛있었다. 오늘 비행하며 타격 입은 몸과 마음이 회복되는 걸 느낀다. 일기장 첫 줄로 예정돼 있던 '오늘은 진짜 역대급으로 힘든 날이다'이 '오늘도 나쁘지 않았다'로 바뀐 듯하다. 마음 가득 들어차있던 미움이 사르르 녹아내린다. 2달러치 배추가 주는 마법 같은 행복이다.
화가 머리끝까지 차오르는 순간, 작아 보이지만 내겐 확실한 행복을 떠올려보자. 거창하지 않아 큰 노력이나 돈 들여 구할 필요 없는 행복을 떠올리자. 집에 가서 만들어 먹을 배추구이처럼, 어이없지만 설득력 있는 행복을 떠올리자.
<알배추 구이>
재료: 알배추, 식용유, 소스재료 (물엿 또는 설탕, 참기름, 액젓, 홍고추, 깨)
배춧잎이 들어갈 만한 사이즈 냄비에 물을 받아 끓인다. 물이 끓는 동안 배추를 손질한다. 배추 밑동을 자른 후 시들한 겉잎을 떼어낸다. 배추 크기에 따라 반으로 가르거나 한 장을 통째로 물에 헹군다. 찾아본 레시피에서 배추를 살짝 데치라고 했는데 나는 중간대가 잘 말리지 않을까 봐 3분 정도 푹 끓였다. 그래도 대가 두꺼워서 아삭한 식감이 죽지 않았다. 익힌 배추를 꺼내 채에 받쳐 물기를 뺀 뒤 한 김 식힌다. 기다리는 동안 소스를 만든다. 간장:물엿(또는 설탕):참기름:액젓(생략가능)=1:1:0.5:0.5 그리고 깨 왕창과 홍고추 반 개를 작게 다져 추가한다. 식은 배추는 두꺼운 부분부터 시작해 돌돌 만다. 식용유를 넉넉히 두른 팬을 달군다. 말린 배추 끝부분이 팬에 닿게 올린다. 자글자글 굽는다. 노릇한 색이 나면 그릇에 담는다. 한 줄 세워 만든 소스를 부어 먹는다. 기름에 구운 거라 고추의 매운맛이 엄청 잘 어울린다. 홍고추가 없으면 스리라차 뿌려먹어도 맛있을 것 같다.
오늘의 결론, 기름에 자글자글 구운건 맛이 없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