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글밭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세중 Oct 17. 2019

외래어에 대하여

국정 그립을 쥐다니!

외래어에 대한 생각은 꽤 열려 있는 편이라 자부한다.

어렸을 때부터 국어순화, 외래어 배격 등에 대해 숱하게 들어왔지만

나중에 생각해 보니 외래어는 그렇게 덮어 놓고 배격할 게 아니었다.


일본어 잔재야 없애는 데 동의하지만 그 일본어 잔재조차도 사실 경계가 불분명하다.

사시미, 사라, 기스, 엑기스, 오봉, 우와기 같은 말을 쓰지 말자는 덴 두말 않고 찬성하지만

가방, 구두, 잉꼬 같은 말까지 쓰지 말자고 한다면 동의할 수 없다.


하물며 일본어 잔재가 그럴진대 서양 언어에서 온 외래어는 더 말할 게 없다.

코스모스, 바나나, 파인애플, 커피, 버스, 택시, 컴퓨터 등과 같은 말을 외래어니까

쓰지 말자고 할 수 있을까.

인터넷, 스마트폰, 앱, 필라테스 같은 말도 마찬가지다.


요컨대 외래어는 덮어 놓고 터부시하거나 배격할 게 아니라는 말이다.

더 나아가 외래어는 우리말 자원을 풍부하게 하는 

긍정적인 면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아 보인다.


오늘날 외국과 교역을 하지 않고 살아갈 수 없듯이 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외국말이라도 필요한 말은 받아들여서 우리의 언어생활을 풍요롭게 해야 한다.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데 인터넷 뉴스 기사에서 어이없는 문구를 보게 됐다.

'曺 사퇴후 '국정 그립' 쥐는 文대통령... 檢개혁.경제 직접 챙긴다'라는 

제목의 인터넷판 톱기사였다.


'국정 그립'에 시선이 멈추면서 여간 뜨악하지 않았다.

'국정 그립 쥐는'이라니!


'그립'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았다.

'라켓배트골프 클럽 따위의 손잡이또는 그것을 잡는 방식.'이라는 뜻풀이가 실려 있었다.

그리고 운동 용어였다.


'국정 그립 쥐는'이 쓰인 기사는 운동 기사가 아니다.

운동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정치 기사다.


'국정 그립 쥐는'이 무슨 뜻인지 감은 온다.

그러나 너무 황당하다.


언론에서 외래어를 쓰는 것은 기자가 외래어를 발굴해서 쓰는 경우보다는 

세상에서 이미 그 말이 꽤나 쓰이기 때문에 쓰는 경우가 보통이다.


그런데 '국정 그립 쥐는'은 그렇지 않아 보인다.

사람들 사이에 '국정 그립을 쥐다'라는 말이 쓰인 것을 들어보지 못했다.

기사를 쓴 기자 또는 제목을 뽑는 편집자가 고안해낸 말일 뿐이다.


'국정 그립 쥐는'의 '그립' 같은 말은 운동용어에 한정돼야 한다.

'국정 고삐 죄는', '국정 다잡는' 같은 말로 얼마든지 표현할 수 있는 것을

'국정 그립 쥐는'이라 하여 독자를 당황하게 만들 이유가 없어 보인다.


인터넷 기사 제목에서 '그립'을 보고 이렇듯 흥분하는 난 이미 '꼰대'가 된 것인가.

젊은 기자들과 언어감각이 달라져 버린...


하지만 우리 언어생활에서 도무지 필요하지 않은 말을 

습관적, 무의식적으로 갖다 쓰는 일은 정말 꼴불견이다.


외래어도 필요할 때 써야지 '국정 그립' 같은 말은 백해무익해 보인다.

언론의 책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매거진의 이전글 무관중 축구 경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