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문현답이다
단어 가운데는 뜻이 꽤 명확한 것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일테면 '집'이라고 하면 집과 집이 아닌 것은 꽤나 명확하게 구분된다. 집인지 아닌지 애매모호한 게 있을까? 집이면 집이고 아니면 아니다. 집은 지붕이 있고 벽으로 둘러싸여 사람이 들어가 살 수 있으면 집이다. 그렇지 않으면 집이 아니다.
그러나 집처럼 대상이 명확하게 규정되는 말도 있지만 미인 같은 말은 그렇지 않다. 미인의 뜻이 분명하지 않은 건 아니다. 미인은 국어사전에 "아름다운 사람. 주로 얼굴이나 몸매 따위가 아름다운 여자를 이른다."라고 정의되어 있듯이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명확한 뜻이 있다. 다만 대상이 명확하지 않을 뿐이다. 누가 아름다운가? 무엇이 아름다운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명확하지 않다. 세상이 미인이라고 칭송하는 배우도 내 눈에는 별로 아름답지 않을 수 있다.
나는 요즘 설사가 잦아져 어제 병원을 찾아갔다. 전에 대장내시경을 받았던 곳이다. 의사의 촉진을 받았다. 손가락이 항문으로 들어왔다. 뭔가 기구도 들어오는 듯했다. 간단한 검사가 끝난 후 의사와 마주앉았다. 설명을 들었다. 설사가 잦은 건 복합적 이유 때문이라 했다. 뽈록 튀어나온 치핵 때문이기도 하고 괄약근 조절이 약해져서기도 하다고 했다.
내가 물었다. "심각한 병은 아니죠? 암은 아니죠?"
두 가지 질문을 연이어 했다. 심각한 병이냐 아니냐는 것과 암이냐 아니냐는 것. 의사는 단호히 말했다. 암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첫 질문에 대한 답을 정색하고 이렇게 하는 것이었다. "심각하죠! 변이 잘 안 멎고 그러면..." 그 순간 아차 싶었다. 내가 우문을 했음을 깨달았다. 난 암이면 심각한 병, 그렇지 않으면 심각하지 않은 병이라 간주하고 "심각한 병은 아니죠?" 했던 것인데 의사의 '심각한 병'은 달랐다. 몸이 정상적으로 기능하지 않으면 의사에겐 심각했던 것이다.
원장은 그 길로 당장 '쏘노' 어쩌구 하는 처치를 간호사에게 지시한 뒤 바로 치핵을 제거한다고 했다. 괄약근 검사실을 거쳐 수술실로 옮겨져 나는 엎드려서 엉덩이에 마취 주사를 맞고 제모를 한 뒤 치핵을 제거했다.
'아름답다', '심각하다', '대단하다', '훌륭하다' 등과 같은 형용사는 개념 자체는 명확하지만 그 개념이 가리키는 대상까지 명확하진 않다. 개념과 대상은 별개다. 여기에 언어의 불완전성과 한계가 있다. 아니 한계인 동시에 여유, 여백이기도 하다.
다음에 병원에 갈 일이 있으면 다시는 "심각한 병은 아니지요?" 같은 우문을 안 할 자신이 있다. 우문인 줄 깨달았으니까. 그건 식당 가서 주인이나 종업원에게 "이 집 음식 맛있어요?" 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현명한 질문에 유익한 대답이 돌아온다. 현문현답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