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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중 Oct 22. 2022

내 바램이 헛되지 않았으면

표준어 규정이라는 게 있다. 국가가 고시한 규정이다. 거기에 '바램'은 비표준어이고 '바람'이 표준어라는 게 있다. '바라다'가 표준어이므로 '바라다'에서 파생된 명사는 '바람'이 표준어라는 것이다. '바램'은 표준어일 수 없다는 것이다.


신문을 읽다가 이에 대해 비판하는 기사를 읽었다. 대구교대 영어교육과 손중선 교수의 기고문이었다. 이 나라에 숱하게 많은 국어국문학과 교수들이 있는데 어쩌다 영어교육과 교수가 국가의 표준어 정책에 대해 비판하는 글을 쓰게 됐는지 의아하다. 국어국문학과나 국어교육과 교수들은 의문을 느끼지 않는다는 말인가?


표준어를 관리하는 기관에 오래 근무하다가 퇴직한 나로서도 재직할 때부터 '바램'은 비표준어이고 '바람'이 표준어라는 규정에 대해 몹시 못마땅했다. 하지만 조직 내에서 소리를 낼 수 없었다. 표준어의 권위는 완고했다. 이제 언론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니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저 비판의 소리가 나왔을 뿐 과연 달라질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바라다'가 표준어이므로 그 파생 명사는 '바람'이어야 한다는 건 말을 규칙 속에 옭아매는 태도이다. 동사는 '바라다'가 표준어지만 명사는 왜 '바램'이 표준어일 수 없나? 표준어 규정 제1항에서 표준어는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이라 하지 않았나. 즉, 두루 쓰는 말이 표준어인데 '바람'이 두루 쓰는 말이냐 말이다. '바램'이 두루 쓰는 말 아닌가. 그렇다면 '바램'이 표준어여야지 않나.


왜 두루 쓰이지 않는 말이 표준어가 되었을까. 표준어라는 것을 1980년대에 정할 때에 소위 국어학자들 몇이서 탁상에서 표준어를 정했기 때문이다. 언중이 '바램'을 쓰는지 '바람'을 쓰는지 살펴보지 않고 국어학자 몇이 모여서 표준어를 논했기에 현실에서 잘 쓰이지 않는 말이 숱하게 표준어로 정해졌다. 몇 십 년 사이에 환경이 달라졌다. 지금은 엄청난 양의 말뭉치(corpus)가 구축돼 있다. 사람들이 말을 어떻게 쓰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말뭉치가 다는 아니다. 그동안 교육을 통해 '바람'이 맞고 '바램'이 틀렸다고 하니 신문과 교과서, 출판물 등에서 '바람'이 주로 쓰였고 그것들이 말뭉치에 반영돼 있다. 애초에 '바램'이 표준어라고 했다면 '바람'은 교과서나 신문, 출판물에 쓰이지도 않았을 텐데 '바람'을 표준어라 하는 바람에 '바람'이 말뭉치에 적지 않게 올랐을 것이다. 아니, 구어 말뭉치는 몰라도 문어 말뭉치는 거의 '바람'뿐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말뭉치를 참고는 하되 전후 사정을 헤아려야 할 것이다.


손중선 교수의 기고문 중에 "굳이 정할 필요 없는 규정(인조문법)을 정하여, 그 규정의 함정에 빠져 허우적대는 주객전도의 꼴이 되어버린 것이다."라는 대목이 특히 와 닿았다. 그렇다. 표준어 규정은 '굳이 정할 필요 없는' 규정이었다. 억지말을 표준어라 했다. 


한겨레신문이 좋은 문제 제기를 했다. 언어정책에 전환이 있기를 기대한다. 언어에 정책은 사실 별로 필요가 없다. 그냥 내버려두면 된다. 멀리 떨어져서 관찰만 하고 개입은 최소한에 그쳐야 한다. 아무도 쓰지 않는 말을 표준어라 강요하면서 국민을 국어 바보로 만들어선 안 된다. '바램'의 복권을 소망한다. 내 바램이 헛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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