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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판 이스칸데르 미사일과 초대형 방사포 같은 대남 타격용 전술핵 무기들도 선보였다. 주민들이 굶어 죽든 말든 왕조의 영속을 위해 핵 폭주를 계속하겠단 얘기다. 한반도의 분단 비극이 4대 세습까지 이어질 것인지 가슴이 답답해 온다. (ㅈ일보 사설, 2023. 2. 10.)
신문마다 사설이 있다. 사설이 없는 신문은 없다. 한편 신문에는 많은 기명 칼럼이 있다. 칼럼은 칼럼니스트가 쓴다. 그런데 사설과 칼럼은 중요한 차이가 있다. 사설은 쓴 사람 이름이 안 나오고 칼럼은 쓴 사람 이름이 반드시 나온다.
사설에 글 쓴 논설위원 이름이 안 나오는 것은 사설이 논설위원 개인의 의견이 아니라 신문사의 의견이요 주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설에는 논설위원의 실명, 신상은 물론 안 나오고 감정도 표현하는 법이 없다. 그런데 오늘 ㅈ일보 사설은 '가슴이 답답해 온다'로 끝났다. 뜨악하다. 여간 뜨악하지 않다. 이런 사설을 본 적이 없다. 논설위원은 사설과 칼럼을 구별하지 못하나. 이젠 사설이 변질됐나. 개인의 감정을 토로해도 되도록 말이다.
신문사마다 교열기자가 있다. 이 신문에도 교열기자가 있다는 걸 안다. 필자가 작년 11월 이 신문에 기고한 적이 있는데 인쇄되기 직전 대장을 내게 보내왔다. 그런데 '틀린 문장'이 '틀리는 문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교열기자가 고쳤지 누가 고쳤겠는가. 어이가 없어서 '틀리는'은 안 되고 '틀린'이 그렇게 싫다면 '잘못된'으로 하라고 했더니 신문에는 '잘못된'으로 나왔다.
멀쩡한 '틀린'을 엉뚱하게 '틀리는'으로 고치는 식의 교열을 할 게 아니라 논설위원이 쓴 '가슴이 답답해 온다'를 다른 말로 바꾸어야 했다. 사설은 사설다워야 한다. '가슴이 답답해 온다'는 개인의 일기나 수필, 감상문 등에서나 어울리는 말이다. 기명 칼럼에서도 쓸 수 있겠지만 사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별꼴을 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