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외래어 표기법
프랑스 동부의 한 작은 마을에 종교 공동체가 있다. 이곳은 교파를 초월해 다양한 기독교 신자들이 공동체를 이루어 수도하는 곳이다. 이곳은 마치 순례지처럼 되어 전세계에서 사람들이 찾아와 기도와 명상을 한다. 이 공동체를 마을 이름을 따서 영어로 Taizé community라 한다.(Taizé는 프랑스어 철자인데 흔히 Taize로 쓴다.) 중앙일보가 이 공동체에 대해 자세히 다루었다. 그리고 한글로 '떼제공동체'라 했다.
이것을 보면서 필자로서는 남다른 생각에 젖는다. 이 공동체 자체에 대해서가 아니라 이 공동체의 한글 표기에 대해서 주목하게 된다. 외래어 표기법이라는 게 있다. 이미 일제강점기 때인 1930년대에 처음 만들어졌고 그것을 바탕으로 1986년에 꽤 정비된 외래어 표기법이 고시되었다. 그 후 동구권 언어를 비롯해 여러 언어의 표기법이 추가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외래어 표기법은 외래어를 한글로 적을 때 지켜야 하는 규칙이다. 기본적으로 현재 쓰고 있는 한글만 가지고 적어야지 그렇지 않은 글자를 써서 외래어를 표기해서는 안 된다는 게 담겨 있고 그밖에 외래어를 적을 때는 받침에 'ㅋ, ㅌ, ㅍ' 따위를 써서는 안 되며 받침에는 오직 'ㄱ, ㄴ, ㄹ, ㅁ, ㅂ, ㅅ, ㅇ' 일곱 글자만 쓰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밖에 외래어를 적을 때는 원칙적으로 된소리 글자(ㄲ, ㄸ, ㅃ)를 쓰지 않도록 하고도 있다.
이 세 큰 원칙 중에서 현재 쓰는 한글 글자만으로 외래어를 적는다는 원칙은 잘 지켜지고 있지만 다른 두 가지는 도전을 받고 있는 중이다. 받침에 'ㄱ, ㄴ, ㄹ, ㅁ, ㅂ, ㅅ, ㅇ'만을 적는다는 원칙은 '짚라인'이라는 말이 보기 좋게 어기고 있다. '집라인'으로 적어야 외래어 표기법에 맞는데 그렇게 적는 경우는 별로 볼 수 없고 신문에서조차 '짚라인'이라 한다. 전국 곳곳의 현장에서 그렇게 적고 있으니 어쩔 수 없이 따라서 하는 거겠지만 외래어 표기법이 무너져 있다.
된소리를 쓰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는 것 또한 곳곳에서 무너지고 있는데 '떼제공동체'가 그 한 예이다. 사실 1995년에 발간된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라는 책이 남 보란 듯이 제목에 '빠리'를 썼다. 출판사인 창작과비평사는 아예 대놓고 우리는 된소리를 쓴다고 선언하고 자사가 내는 책에서 된소리를 써왔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수많은 신문사, 방송사는 그동안 외래어 표기에서 된소리 대신 거센소리를 적어 왔다. 심지어 방송사 특파원이 입으로 말할 때는 '빠리에서 000 특파원입니다'라 하면서도 화면의 자막에서만큼은 '파리, 000 특파원'이라고 해 왔다. 그런데 이 된소리를 쓰지 않는다는 원칙이 조금씩 무너지고 있다. 따르지 않는 언론이 나타나고 있다.
그럼 왜 외래어 표기법은 된소리를 쓰지 않기로 했을까. 이유가 없지 않다. 사실 프랑스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등의 k, t, p 소리를 들어 보면 영락없는 'ㄲ, ㄸ, ㅃ'이지 'ㅋ, ㅌ, ㅍ'와는 거리가 한참 멀다. 이들 언어는 영어, 독일어와 달라 k, t, p의 발음에 기식성(aspiration)이 없어서 한국사람이 듣기에는 확실히 'ㄲ, ㄸ, ㅃ'이다. 그럼에도 외래어 표기법을 정한 이들은 이미 1930년대부터 된소리를 쓰지 않고 거센소리를 쓰기로 원칙을 정해 두었다. 그렇게 한 이유는 외래어 표기를 좀 간편하게 하자는 뜻에서였다. 어떤 언어는 'ㅋ, ㅌ, ㅍ'로 적고 어떤 언어는 'ㄲ, ㄸ, ㅃ'로 적는다면 우리가 잘 모르는 언어를 적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ㅋ, ㅌ, 프'로 적어야 하나, 'ㄲ, ㄸ, ㅃ'로 적어야 하나? 일테면 인도의 인명, 지명을 적을 때는 어떻게 적을 것이며 아프리카의 그 많은 나라들의 인명, 지명을 적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난감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런 곤란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고자 어느 한쪽으로 몰아주었다. 된소리를 쓰지 않고 거센소리로 통일하기로 한 것이다.
그래 놓고 보니 문제가 생겼다.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는 우리가 곧잘 들어보는 언어다. 교류가 얼마나 활발한가. 특파원도 나가 있고 유학생도 많다. 관광객도 그 지역을 오죽 들락거리는가. 현지인들의 발음을 들어 보면 영락없이 된소리인데 거센소리로 적으니 불만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다. 이제 둑이 무너지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사실 베트남어, 태국어는 이미 표기법에서 된소리를 쓰도록 하였다. 이들 언어는 한국어와 똑같이 'ㄱ, ㄷ, ㅂ', 'ㅋ, ㅌ, ㅍ', 'ㄲ, ㄸ, ㅃ'의 세 갈래 대립이 있는 언어여서 된소리를 막을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태국의 '푸껫', 베트남의 '호찌민' 등과 같은 된소리가 합법적으로 쓰이게 됐다. '푸켓', '호치민'으로 쓰면 오히려 틀린다. 그런데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에서는 그런 된소리 허용이 없는데 '떼제공동체'처럼 된소리를 쓴 예가 나타났다.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그럼 이제 '파리'는 어떻게 하나? '빠리'로 하나? '퐁피두'는 '뽕삐두'라 하나? '나폴레옹'은 '나뽈레옹'으로 하고 '모파상'은 '모빠상'으로 하나? '콩코르드광장'은 '꽁꼬르드광장'이라 하고 '팡테옹'은 '빵테옹'이라 할 것인가? '칸'은 '깐'으로, '몽펠리에'는 '몽뻴리에'로, '툴루즈'는 '뚤루즈'로 하나? 수많은 인명, 지명이 문제가 된다. '떼제공동체'는 떼제공동체만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일반인은 별로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겠지만 말과 글에 관심 있는 이라면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니다.
이런 곤란은 왜 생겼나. 애초에 된소리를 배제했던 데서 출발함은 물론이다. 된소리를 허용하면 된소리를 써야 하는 언어와 거센소리를 써야 하는 언어로 나누게 되고 전세계의 지명, 인명을 표기하면서 일일이 어떻게 이를 구별할 것인지 지레 걱정하여 된소리를 배제한 데서 어려움이 시작됐다. 만일 처음부터 된소리에 가까운 언어는 된소리로 적고 거센소리에 가까운 언어는 거센소리로 적는다고 했으면 어떻게든 그에 맞추어 지내 왔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어렵고 불편할 거라 예상하고 된소리를 배제하는 바람에 지금 봇물이 터지기 시작했다.
브랜드 이름은 이미 오래 전부터 된소리를 쓴다. 외래어 표기법을 따르자면 아반테 해야겠지만 아반떼라 한 지 오래고 쏘나타, 싼타페도 마찬가지다. 상표명은 회사의 고유 권한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지명, 인명은 국가 어문규범을 따라야 할 텐데도 '떼제공동체'가 유력지 기사 제목에서 나타났다. 이제 이 문제를 공론화할 때가 됐다. '파리'라고 적고 '빠리'라 발음하는 건 합리적이지 않다. '카페'라 적지만 '까페'라 발음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꼬냑'이라 흔히 발음하지만 국어사전에는 '코냑'이라 돼 있고 '꽁뜨'나 '꽁트'는 사전에 없고 '콩트'라 돼 있다. 하지만 '나폴레옹', '모파상' 같은 이름은 '나뽈레옹', '모빠상'이 낯선데 어떡하나. 이와 반대로 '카뮈'보다는 '까뮈'가 더 익지 않나? 가히 진퇴양난이다.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를 정도다.
첫 단추가 잘못 꿰어진 때문에 이런 혼란이 빚어졌다. '떼제공동체'를 보면서 외래어 표기법을 왜 어기느냐고 비난할 생각이 없다. 이런 움직임이 쌓일 때 비로소 변화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봇물을 틀어막는 데는 한계가 있다. 터줄 방안을 찾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