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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중 May 29. 2024

한양도성을 맛보다

동대문에서 혜화문까지

일행은 5월 28일 9시 30분 동대문역 7번 출구 앞에서 만났다. 이날은 문화해설사의 해설을 들으며 한양도성을 둘러보기로 한 날이다. 물론 한양도성 18.6km 전부를 걷는 것은 아니고 동대문에서 혜화문까지 약 3km만을 걷는다.


한양도성은 1396년에 건설되었다고 한다. 조선왕조가 성립한 지 4년 만이다. 조선왕조를 세운 태조 이성계는 1392년 개성 수창궁에서 왕위에 올랐단다. 그러나 개성 사람들은 이성계를 무척 싫어했다. 고려를 무너뜨렸으니까. 결국 이성계는 개성을 버리고 새로운 도읍을 찾아 나섰고 서울이 바로 그곳이었다. 먼저 종묘를 건설하고 경복궁을 지었으며 그리고 한양도성을 쌓았다. 


한양도성을 쌓은 사람들에 대한 설명이 흥미로웠다. 한양도성 18.6km 구간의 남동쪽은 경상도 사람들이 와서 쌓았고, 남서쪽은 전라도 사람들이, 북서쪽은 평안도 사람들, 북동쪽은 함경도 사람들이 와서 쌓았다고 했다. 각자 자기 살던 곳에서 제일 먼저 닿는 곳에서 일하는 게 당연하다. 성을 쌓는 동안 숙식은 백성들 스스로 해결했다니 놀랍다. 쌀과 반찬을 지고 올라왔다는 거 아닌가. 물은 어떻게 조달했을까. 다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한양도성은 태조, 세종, 숙종, 순조 시기에 각각 쌓았단다. 태조 때는 처음 만들었고 그 후에는 보수였을 것이다. 그런데 성을 쌓는 데 사용된 돌이 달랐단다. 태조 때는 대충 아무 돌이나 쌓았고 그게 곧 허물어졌을 테니 세종 때는 제법 모양이 반듯한 돌을 골라서 쌓았고 숙종, 순조 때 쌓은 돌은 직육면체에 가까운 각진 돌을 썼다. 한 면의 길이가 60cm인 직육면체 돌은 여간 무겁지 않았을 텐데 가공하고 쌓아 올리는 데 여간 힘들지 않았으리라.


동대문 부근 옛 이화여대 병원 있던 자리에 한양도성박물관이 있었다. 그런 박물관이 있을 줄이야! 어서 한양도성이 유네스코세계유산에 등재되기를 기대한다. 낙산에서 내려다본 서울 시내는 손에 잡힐 듯했다. 남산, 안산, 인왕산, 북악산이 선명했고 멀리 북한산과 도봉산도 보였다. 


도성은 왜 쌓았을까. 성을 지키려는 뜻도 있었지만 성 안과 성 밖을 구별하고자 하는 뜻이 컸다는 설명을 들었다. 오죽하면 '성 안 '과 '성 밖 '이란 말이 있었겠나. 서울에 4대문이 있고 4소문이 있다. 4대문 중에선 서대문, 즉 돈의문만 자취도 없고 4소문 중에서는 서소문, 즉 소의문만 흔적이 없단다. 그저 돈의문의 자리가 지금 경향신문과 강북삼성병원 사이쯤 된다는 것만 알 뿐... 복원하고자 해도 대로라 복원이 불가능하단다. 서대문은 역사도 기구했다고 했다. 처음 세운 위치에서 근처로 옮겼다가 다시 원래 자리에서 새로 지었다나. 오늘날 신문(新門路)와 '새문안교회'의 신문, 새문이 서대문의 새로 지은 문을 가리켰다니 지명의 역사가 여간 뿌리 깊지 않음을 알겠다. 문제는 신문이든 새문이든 문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도성을 쌓느라 고혈을 바쳐야 했던 백성들의 한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조선왕조는 518년이나 계속됐다. 이렇게 오랜 왕조가 흔치 않다. 왕조가 문을 닫고 다시 100년 이상이 지났다. 국토는 쪼개지고 서로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다. 국태민안(國泰民安)은 여전히 이루어야 할 꿈일 뿐 태평성대는 요원해 뵌다. 인구가 줄어 국가 소멸이 걱정되기까지 하니 어인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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