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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중 Jul 25. 2024

'이전하며 또는'이 무슨 말?

서로 충돌하고 그래서 모순이다

우리나라에 수많은 법률이 있지만 민법은 아주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양이 방대해서만은 아니다. 모든 법의 원류요 기본이라고 할만하기 때문이다. 로스쿨의 교과과정에서도 민법은 특히 큰 비중을 차지한다. 다른 많은 법률은 굳이 따로 공부하지 않아도 읽어보면 해석할 수 있지만 민법을 비롯한 형법, 상법, 민사소송법, 형사소송법과 같은 기본법은 혼자서 깨칠 수가 없다. 깊이가 여간 깊지 않다. 


이런 사정은 우리나라만 그런 게 아니고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사정이 있다. 우리나라 기본법에는 말이 안 되는 문장이 상당히 많다. 말이 되더라도 워낙 내용에 깊이가 있기 때문에 그 조문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강의를 듣고 관련 참고서를 읽어야 하는데 법조문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다음 민법 제292조 제1항은 그런 예다.


민법

제292조(부종성) 

①지역권은 요역지소유권에 부종하여 이전하며 또는 요역지에 대한 소유권이외의 권리의 목적이 된다. 그러나 다른 약정이 있는 때에는 그 약정에 의한다.


비록 문장이 그리 길지는 않아도 '지역권', '요역지', '부종하다' 같은 전문용어가 들어 있기 때문에 이 조문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지역권', '요역지', '부종하다' 같은 말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한 이 조문의 의미는 깨닫기 어렵다.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 조문의 의미하는 바는 이런 용어들을 이해하고 보면 그리 어렵지 않다. 지역권은 다른 사람이 소유한 토지를 이용할 권리를 말한다. 요역지는 이용하게 되는 다른 사람의 토지를 가리킨다. 지역권은 소유권에 부종한다는 것은 지역권이 소유권에 따라간다는 뜻이다. '지역권이 요역지에 대한 소유권 이외의 권리의 목적이 된다'는 것은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토지를 이용할 권리를 갖고 있는데 토지 소유자가 그 토지를 제3자에게 팔면 제3자는 다른 사람의 토지를 이용할 권리도 이어받게 된다는 뜻이다. 물론 이렇게 설명해도 쉽게 이해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법률가가 아닌 필자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그 법리가 아니다. 법조문에 '이전하며 또는'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게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이전하'가 나온 이상 '또는'이 나올 수가 없는데 '또는'이 나왔다. '또는'이 꼭 쓰여야 한다면 '이전하며'가 아니라 '이전하거나' 또는 '이전되거나'여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법의 취지가 아니다. '이전하며'를 쓸 수밖에 없다. 요컨대 '-'와 '또는'은 충돌하여 모순이다. 그래서 이 문장은 아무리 읽어도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문장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잘못된 문장이지만 법률가들은 '또는'을 무시하고 해석하는 모양이다. 엄연히 있는 '또는'을 무시하고 해석할 게 아니라 법을 개정해서 '또는'을 삭제해야 한다. 말이 안 되는 문장을 그대로 유지하는 이유가 뭔가. 이래서 법조문이 암호 같다는 얘기를 듣는 것이다. 법을 처음 공부하는 법대생이나 로스쿨생들이 고초를 겪고 있고 법무사 시험 공부를 수험생들이 힘들어하고 있다. 이런 말이 안 되는 법조문은 법에 대한 국민의 접근을 가로막는 암초 같은 것이다. 이제 바로잡을 때도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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