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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중 Aug 06. 2024

'신의에 좇아'는 말이 안 된다

이전 세대가 남겨놓은 일본어 흔적 씻어내야

제1118조까지 있는 민법은 법률 중 가장 방대한 법률인데 제2조에 아주 이상한 표현이 들어 있다. '신의에 좇아'가 그것이다. 민법 제2조 제1항은 다음과 같다.


민법

제2조(신의성실) ①권리의 행사와 의무의 이행은 신의에 좇아 성실히 하여야 한다.


민법은 가장 기본이 되는 법이고 그 제2조는 이른바 '신의칙'이라 하는 것으로 법조인, 법학도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조항이다. 그 조문에 들어 있는 '신의에 좇아'는 바른 한국어 표현인가. 아마 이 문구를 처음 보는 사람은 누구나 이상하다고 느낄 텐데 법조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워낙 눈에 익어 이상한 줄 모를 것이다. 그들에게 '신의에 좇아'에서 중요한 것은 '신의'이지 조사 ''나 동사 '좇아'는 그닥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신의에 좇아'가 바른 국어 표현이 아님을 잘 깨닫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신의에 좇아'는 왜 이상한 표현이고 틀린 말인가. 무엇보다 조사 ''가 틀렸다. '좇다'는 '부귀를 좇다', '명예를 좇다', '권력을 좇다', '이익을 좇다'에서 보듯이 목적어가 있어야 하는 타동사다. 그리고 그 목적어에는 조사 '을/를'이 붙는다. 그런데 '신의 좇아'가 아니라 '신의 좇아'이니 조사를 잘못 썼다.


그럼 왜 '신의 좇아'라는 잘못된 표현이 민법에 들어오게 되었을까. 불행히도 이는 일본 민법 조문을 잘못 번역한 데서 비롯되었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잘 알려진 것처럼 우리나라 기본법은 일본 법에 크게 의지해서 만들어졌다. 상당수 조문이 일본 민법과 내용이 꼭같다. 신의칙도 그러하다. 해당 일본 민법 조문을 보자.


第一条 私権は、公共の福祉に適合しなければならない。

2 権利の行使及び義務の履行は、信義に従い誠実に行わなければならない。


일본 민법 제1조 제2항은 "権利の行使及び義務の履行は、信義に従い誠実に行わなければならない。"이고 여기에 '信義に従い'라는 표현이 들어 있다. 이것을 우리 민법에서 '신의에 좇아'라고 번역한 것 아니겠는가. '信義'는 일본어나 한국어나 같고, ''를 '', '従い'를 '좇아'로 번역했는데 ''를 '에'로 번역한 게 잘못이었다. ''을 '좇아'라 한 이상 '신의 좇아'라 해야 하는데 '신의 좇아'라 한 것이다. ''는 ''라는 등식이 머리에 박혀 있는 바람에 타동사인 '좇다'의 목적어에 조사 '을/를'이 쓰여야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 결과 '신의에 좇아'라는 전혀 국어답지 않은 괴상한 표현이 민법에 들어오게 되었고 지금까지도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런데 우리 법률가들은 '신의에 좇아'라는 표현이 잘못된 말임을 모르지 않았다. 그 증거가 민사소송법에 있다. 민사소송법에도 민법처럼 원래는 '신의에 좇아'라는 표현이 들어 있었다. 즉 2002년까지 민사소송법 제1조는 다음과 같았다. 


민사소송법

제1조 (신의성실의 원칙) 법원은 소송절차가 공정ㆍ신속하고 경제적으로 진행되도록 노력하여야 하며, 당사자와 관계인은 신의에 좇아 성실하게 이에 협력하여야 한다.


그런데 2002년에 민사소송법을 전부개정할 때 제1조는 다음과 같이 바뀌었다. 제1조를 제1항과 제2항으로 나누었고 제2항을 다음과 같이 바꾸었던 것이다.


민사소송법

제1조(민사소송의 이상과 신의성실의 원칙) 

②당사자와 소송관계인은 신의에 따라 성실하게 소송을 수행하여야 한다.


'신의에 좇아'를 '신의에 따라'로 바꾸었다. '신의에 좇아'가 어법에 맞지 않음을 인정하고 어법에 맞게 '신의에 따라'로 바꾼 것 아니겠는가. 그 결과 민법에서는 '신의에 좇아'가 여전히 그대로인 데 반해 민사소송법에서는 '신의에 따라'이다. 민사소송법은 바른 국어 표현으로 바로잡았지만 민법에는 틀린 표현이 그대로 있는 것이다.


민법도 변화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법무부는 민법의 내용은 손대지 않고 오로지 낡은 표현만을 반듯하게 바로잡기 위한 민법개정위원회를 구성했고 이 위원회가 수십 차례 회의를 하여 2018년 민법개정안을 완성했다. 그리고 법무부는 이를 2019년 제20대 국회에 제출하였다. 개정안에는 '신의에 좇아'가 '신의를 지켜'로 바뀌어 있었다. 문제는 개정안이 국회에서 폐기되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국회는 민법 개정에 적극적이지 않았고 임기 내에 민법개정안을 처리하지 않는 바람에 자동폐기됐다. 결과 지금도 민법에는 '신의에 좇아'가 그대로이다.


민법 제2조의 '신의에 좇아'는 부끄러운 일본어 유산이다. 일본어에 익숙했지만 한국어에는 무디었던 앞선 세대가 남겨놓은 잘못된 표현이다. '신의에 따라'나 '신의를 지켜'로 바로잡아야 한다. 말로만 극일을 외친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우리 법조문 안에 남아 있는 일본어 잔재를 씻어내야 한다. 말이 안 되는 표현을 왜 아직도 안고 있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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