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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중 Aug 16. 2024

쉬운 표현 놔두고 왜 비틀어 쓰나

'의'는 주격조사가 아니다

1,118조까지 있는 방대한 민법에는 뭔가 께름칙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조문이 적지 않다. 뭘 말하려고 하는지는 감이 오지만 도무지 그 문장 표현이 낯설고 심지어 해괴하기까지 한 조문이 곳곳에 있다. 표현이 낯설면 의미도 쉽게 파악되지 않는다. 아주 쉽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을 이상하게 표현해서 '이게 무슨 뜻이지?' 하는 의문을 낳는다면 정상적인 법조문이라 할 수 있을까. 다음 민법 제914조를 보자.


민법

제914조(거소지정권) 자는 친권자 지정한 장소에 거주하여야 한다.


자는 자녀를 말하고 친권자는 보통 부모가 될 텐데 부모가 없으면 조부모도 친권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나타내고자 하는 뜻은 명료하다. 자녀는 친권자가 지정한 곳에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물론 이런 민법 조문이 없더라도 자는 친권자가 지정한 장소에 살 수밖에 없는 것이 보통이다. 친권자가 지정한 곳이란 친권자가 사는 집 아니겠는가. 자녀는 친권자의 보호를 받으며 친권자와 함께 살아야 한다는 뜻이겠다.


이 당연한 이치를 담은 민법 제914조 "자는 친권자의 지정한 장소에 거주하여야 한다."는 '친권자의 지정한 장소' 때문에 바르게 썼더라면 한 번 읽어도 될 것을 두 번, 세 번 읽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친권자 지정한 장소'가 일상적이고 상식적인 표현인가. 정상적인 국어인가. 아니다. '친권자 지정한 장소'가 정상적인 국어 표현이다. '지정한'이라는 동사가 쓰였으면 주어가 있어야 하는데 '친권자'가 주어지 '친권자'가 주어일 수는 없다. ''는 관형격조사이지 주격조사가 아니다. 문법을 어겼다.


'친권자 지정한 장소'라 해야 할 것을 '친권자 지정한 장소'라고 1950년대 법률가들은 민법에 담았다. 이는 당시 법률가들의 국어 수준, 국어 의식을 고스란히 보여 준다. 일부러 비틀어서 이렇게 이상하게 쓴 건지 '친권자 지정한 장소'가 최선의 바른 국어 표현이라 생각해서 그렇게 썼는지는 잘 알 수 없다. 요컨대 '친권자 지정한 장소'라야 국어 문법에 맞고 그래야 쉽게 이해된다. 틀린 표현이 민법 제정 때 들어와 자리잡았는데 70년이 가깝도록 고쳐지지 않고 그대로다.


민법 제914조만이 아니다. 다음 민법 조문들을 보자.


제29조(실종선고의 취소) 실종자 생존한 사실 또는 전조의 규정과 상이한 때에 사망한 사실의 증명이 있으면 법원은 본인, 이해관계인 또는 검사의 청구에 의하여 실종선고를 취소하여야 한다. 그러나 실종선고후 그 취소전에 선의로 한 행위의 효력에 영향을 미치지 아니한다.


제626조(임차인의 상환청구권) 

②임차인이 유익비를 지출한 경우에는 임대인은 임대차종료시에 그 가액의 증가가 현존한 때에 한하여 임차인 지출한 금액이나 그 증가액을 상환하여야 한다. 이 경우에 법원은 임대인의 청구에 의하여 상당한 상환기간을 허여할 수 있다.


민법 제29조 제1항의 '실종자 생존한 사실', 제626조 제2항의 '임차인 지출한 금액'에서도 '생존한', '지출한'이라는 동사의 주어에 관형격조사 ''가 쓰였다. 주어에는 주격조사를 써야지 관형격조사를 써서는 안 된다. '실종자 생존한 사실', '임차인 지출한 금액'이라고 했더라면 얼마나 이해하기 쉬운가. 왜 조사를 잘못 써서 문장을 아리송하고 애매모호하게 느껴지게 만드나. 틀린 조사를 쓰는 게 법조문의 특권인가. 그럴 턱이 없다. 틀린 것은 바로잡아야 할 뿐이다. 이 당연한 걸 바로잡는 게 그다지도 힘이 드나. 국회의원들은 대체 뭘 하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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