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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중 Aug 26. 2024

법률의 규정에 의함이 아니면?

'않다'를 쓸 자리에 '아니다'를 쓴 결과

법인이 있다. 법인과 반대되는 개념이 사람이다. 법인은 사람이 아니면서 사람처럼 권리와 의무의 주체가 되는 것을 말한다. 흔히 사단법인, 재단법인이라고 한다. 학교법인, 법무법인, 노무법인, 회계법인, 세무법인, 사회복지법인 등과 같은 법인도 있다. 민법은 이 법인의 성립 요건을 '법률의 규정에 의해서만'이라고 제한한다. 그게 민법 제31조다.


민법

제31조(법인성립의 준칙) 법인은 법률의 규정에 의함이 아니면 성립하지 못한다.


이 간단한 문장의 뜻을 모를 사람은 아마 별로 없을 것이다. 법인이 성립하려면 법률의 규정에 의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굳이 법률의 규정에 의하지 않고도 사람인 것 자체로 사람으로 인정받는다. 그러나 법인은 다르다. 법률의 규정을 따라야만 법인이 될 수 있다. 이 민법 제31조에 토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동안 이 민법 제31조에 의문을 제기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국어문법의 관점에서 보면 "법인은 법률의 규정에 의함이 아니면 성립하지 못한다."는 어처구니없는 문장이다. '아니면'이란 말이 쓰일 자리가 아닌데 '아니면'이 쓰였기 때문이다. "법인은 법률의 규정의함이 아니면 성립하지 못한다."를 "법인은 법률의 규정의하지 않으면 성립하지 못한다."와 비교해 보면 뭐가 잘못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쪽이 자연스러운가. 물으나마나 "법인은 법률의 규정에 의하지 않으면 성립하지 못한다."가 자연스럽게 느껴질 것이다.


그럼 왜 "법인은 법률의 규정에 의함이 아니면 성립하지 못한다."는 어딘가 이상하고 "법인은 법률의 규정에 의하지 않으면 성립하지 못한다."는 자연스러울까. 그것은 "법인은 법률의 규정에 의하지 않는다."는 말이 되지만 "법인은 법률의 규정에 의함이 아니다."는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법인은 법률의 규정에 의함이 아니다."나 "법률의 규정에 의함이 아닌 법인"은 말이 안 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법인은 법률의 규정에 의함이 아니면 성립하지 못한다."가 어색하고 부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이다. 


조문이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 짐작되니까 넘어가 왔겠지만 "법인은 법률의 규정에 의함이 아니면 성립하지 못한다."는 우스꽝스러운 문장, 아니 틀린 문장이다. '아니면'을 쓸 자리가 아닌데 '아니면'을 썼기 때문이다. 민법 제31조는 1950년대 법률가들의 국어 수준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틀린 문장은 그 후 바로잡았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바로잡아야 하지 않겠는가. 민법 제31조는 "법인은 법률의 규정에 의하지 않으면 성립하지 못한다."로 고쳐야 한다. 틀린 문장을 새로운 세대에까지 물려줘야 하나. 그들에게 왜 부끄러운 과거를 떠안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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