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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중 Sep 12. 2024

임무를 '해태한' 때에는?

아직도 이 말을 써야 하나

민법, 상법에 '해태하다'가 여러 군데에 들어 있다. 한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민법

제65조(이사의 임무해태) 이사가 그 임무를 해태 때에는 그 이사는 법인에 대하여 연대하여 손해배상의 책임이 있다.


민법 제65조에서 '임무를 해태한 때에는'이라고 했는데 이 말의 뜻은 '임무를 제때에 하지 않은 때에는'이다('해태'는 懈怠로서 게으를 해(懈)게으를 태(怠)이다). 달리 말하면 '임무를 게을리한 때에는'이다. '임무를 게을리한 때에는'이라고 했다면 누구라도 뜻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터인데 '임무를 해태한 때에는'이라 되어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게 무슨 말이지?' 싶을 것이다. '해태하다'라는 말을 일상생활에서 들어보거나 사용한 적이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더욱이 이 '해태하다'는 국어사전에도 없다. 국어사전에 '해태(懈怠)하다' 있기는 한데 국어사전에 있는 '해태하다'는 형용사이다. '행동이 느리고 움직이거나 일하기를 싫어하는 데가 있다'라 뜻풀이되어 있다. '해태한 모습', '해태한 사람' 따위로 쓰일 수 있다는 것이지 '임무를 해태했다', '등기를 해태했다', '신청을 해태했다'와 같이 동사로 쓰이는 말은 아니라는 것이다. 


국어사전에 형용사로 올라 있기는 하지만 형용사로 '해태하다'를 쓰는 일도 실은 일상언어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게다가 동사로서 '해태하다'는 국어사전에 아예 올라 있지도 않다. 말하자면 민법 제65조의 '임무를 해태한 때에는'의 '해태한'은 국어사전에 없는 말로서 국어가 아니다. 오직 법조문에서만 쓰이고 있다.


그렇다면 생소하기 짝이 없는 '해태하다'를 법조문에서 굳이 써야 하나? 수많은 사람들이 법조문에서 '해태하다'를 접하고 '이게 무슨 말이지?' 하는 의문을 느낄 것 아닌가. 그래도 상관없나. 그런데 이런 의문에 대한 실마리를 민법 제755조와 제942조에서 찾을 수 있다. 민법 제755조 제1항과 제942조 제2항은 다음과 같다.


민법

제755조(감독자의 책임) ① 다른 자에게 손해를 가한 사람이 제753조 또는 제754조에 따라 책임이 없는 경우에는 그를 감독할 법정의무가 있는 자가 그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 다만, 감독의무를 게을리하지 아니한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전문개정 2011. 3. 7.]


제942조(후견인의 채권ㆍ채무의 제시) 

② 후견인이 피후견인에 대한 채권이 있음을 알고도 제1항에 따른 제시를 게을리한 경우에는 그 채권을 포기한 것으로 본다. [전문개정 2011. 3. 7.]


다른 많은 조문에서 '해태하지', '해태한'으로 쓰고 있지만 민법 제755조 제1항과 제942조 제2항에서는 '게을리하지', '게을리한'으로 쓰고 있다. 제755조와 제942조는 2011년에 개정된 조로서 이 조들을 개정하면서  '해태하다' 대신 '게을리하다'를 쓴 것이다(제755조의 제목이 종전에는 '책임무능력자의 감독자의 책임'이었는데 '감독자의 책임'으로 바뀌었다). 아쉬운 것은 민법의 다른 여러 조에 들어 있는 '해태하다'는 그대로 두고 제755조와 제942조에서만 '해태하다'를 '게을리하다'로 바꾼 점이다. 그 결과 아직도 민법의 많은 조문에서 '해태하다'가 쓰이고 있고 제755조와 제942조에서는 '게을리하다'가 쓰이고 있다. '해태하다'와 '게을리하다'가 뒤섞여 있는 것이다.


2011년 민법을 개정하면서 제755조와 제942조에서 '해태하다'를 버리고 '게을리하다'로 바꾼 것은 지극히 바람직했다. 그러나 민법의 나머지 조에서는 여전히 '해태하다'가 남아 있음은 아쉽다. 한 법률 안에서 '해태하다', '게을리하다'가 공존하고 있는데 통일이 필요하다. 왜 민법은 누더기 같은 모습을 하고 있어야 하나. 일제히 표현을 정비해야 한다. 경력이 오래된 법조인들은 '해태하다'가 익숙해서 별로 불편을 못 느끼겠지만 법조의 길에 들어서는 신진 법조인을 생각해야 하고 더 나아가 일반 국민을 생각해야 한다. 법은 법조인만 알면 그뿐일까.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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