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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중 Oct 02. 2024

위기하여?

이렇게 낯선 말을 법조문에 굳이 두어야 하는 이유는?

민법 제197조의 제목 '점유의 태양'이란 말은 한자로 '占有의 態樣'이었을 때는 뜻을 짐작하고 추측해볼 수 있었지만 한글로 적히는 순간 매우 낯설게 느껴진다. '태양'이 '態樣'일 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태양(態樣)'이란 말은 국어에서 좀체 쓰이지 않는 말이다. 


이와 비슷한 경우가 민법 제299조에 나오는 '위기', '위기하여'이다. 민법 제299조는 다음과 같다.


민법

제299조(위기에 의한 부담면제) 승역지의 소유자는 지역권에 필요한 부분의 토지소유권을 지역권자에게 위기하여 전조의 부담을 면할 수 있다.


'승역지', '지역권' 같은 말이 법률용어기 때문에 이 조문의 뜻을 일반인이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이들 용어의 뜻을 이해하고 나면 이 조문이 의도하는 내용은 사실 그리 복잡하지 않다. 내 토지를 이웃 토지 소유자에게 사용하게 하면서 그 사람의 편의를 위해 내가 내 토지에 비용을 들이기로 약속했다고 치자. 그런데 만일 들여야 하는 비용이 너무 커서 몹시 부담이 된다면 아예 내 토지의 소유권을 이웃에게 주어 버림으로써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게 제299조의 뜻이다. 복잡한 내용이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왜 마냥 어렵게 느껴지는 걸까.


'승역지', '지역권', '지역권자' 같은 법률용어도 어렵지만 특히 '위기하여'가 문제다. '위기하여'는 '委棄하여'이다. ''는 '맡길 '이고, ''는 '버릴 '다. 위기는 남에게 맡기고 버리는 것으로 간단히 말해 남에게 양도하는 것이다. 문제는 '위기하다'라는 말을 그런 뜻으로 잘 쓰느냐는 것이다. '위기하다'는 국어에서 잘 쓰지 않는 말이다. 쓰지 않으니 생소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2019년 법무부가 제20대 국회에 제출한 민법개정안은 다음과 같이 쉽게 바뀌었다.


299(소유권 양도의 의사표시에 의한 부담 면제승역지의 소유자는 지역권에 필요한 부분의 토지소유권을 지역권자에게 양도한다는 의사표시를 함으로써 298의 부담을 면할 수 있다.


제목의 '위기'를 '소유권 양도'로 바꾸었고 '위기하여'를 '양도한다는 의사표시를 함으로써'라고 했다. 누구나 알 수 있게 되지 않았는가. 그러나 이 민법개정안은 제20대 국회에서 처리되지 않아 임기 만료와 함께 폐기되었다. 그래서 지금도 민법 제299조에는 '위기', '위기하여'가 그대로 있다. 민법을 국민 누구나 알기 쉽게 바꾸려는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법은 국민이 읽고서 대강이라도 뜻을 알 수 있어야 하지 않나. 그래야 법을 지킬 수 있지 않는가. 도무지 알 수 없는 말을 법조문에 그대로 두어야 하는 까닭이 무엇인가.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국회의원들이 깨달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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