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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중 Oct 02. 2024

'동전'도 문제다

한글로만 바꾸는 게 능사일까

민법, 형법, 상법, 민사소송법, 형사소송법은 헌법과 함께 기본 6법이다. 이들 기본법은 1950년대와 1960년대 초에 걸쳐 제정되었다. 당시는 국한 혼용을 하던 시대였고 법도 당연히 한자로 씌었다. 


한 예로 상법 제4조와 제5조를 보자. 지금도 공식적으로는 다음과 같다.


상법

第4條(商人-當然商人) 自己名義로 商行爲를 하는 者를 商人이라 한다.

第5條(同前-擬制商人) ①店鋪 其他 類似한 設備에 依하여 商人的 方法으로 營業을 하는 者는 商行爲를 하지 아니하더라도 商人으로 본다.

②會社는 商行爲를 하지 아니하더라도 前項과 같다.


제4조의 제목은 '商人-當然商人'이고 제5조의 제목은 '同前-擬制商人'이다. 여기서 '同前'이 무엇일까. 앞과 같다는 뜻이다. 즉 제4조의 제목 '商人'과 같다는 것이다. 


이렇게 한자로 적혔을 때는 '同前'이 '商人'을 가리키는 줄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  '같을 同', '앞 前'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 법전은 한글로 바꾸어 제공한다. 그래서 상법 제5조는 다음과 같다.


제5조(동전-의제상인) ①점포 기타 유사한 설비에 의하여 상인적 방법으로 영업을 하는 자는 상행위를 하지 아니하더라도 상인으로 본다.

②회사는 상행위를 하지 아니하더라도 전항과 같다.


그냥 '동전'이라고 되어 있으니 '동전'이 뭔가 하고 골똘히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同前이라 되어 있었을 때는 앞 조의 제목과 제목이 같구나 하고 깨달을 수 있지만 한글로 적혀 있으면 그런 사정을 알기가 쉬운가. 만일 '앞과 같음'이라면 쉽게 알겠지만 '동전'은 좀체 쓰지 않는 말이라 어리둥절하기 마련이다. 


상법에만 이런 게 있는 게 아니다. 민법 제354조, 제378조, 제402조, 제514조, 제570조, 제571조, 제641조, 제668조, 제669조에도 '동전'이 나온다. 형사소송법 제43조, 제226조, 제227조, 제291조, 제341조, 제381조, 제417조, 제421조, 제434조, 제471조에도 '동전'이 있다. 한 예로 민법 제513조와 제514조는 다음과 같다.


민법

제513조(배서의 자격수여력) ①증서의 점유자가 배서의 연속으로 그 권리를 증명하는 때에는 적법한 소지인으로 본다. 최후의 배서가 약식인 경우에도 같다.

②약식배서 다음에 다른 배서가 있으면 그 배서인은 약식배서로 증서를 취득한 것으로 본다.

③말소된 배서는 배서의 연속에 관하여 그 기재가 없는 것으로 본다.


제514조(동전-선의취득누구든지 증서의 적법한 소지인에 대하여 그 반환을 청구하지 못한다. 그러나 소지인이 취득한 때에 양도인이 권리없음을 알았거나 중대한 과실로 알지 못한 때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그런데 법무부가 2019년 제20대 국회에 제출한 민법개정안에는 제514조가 다음과 같이 바뀌어 있었다. 


514(배서의 자격 수여적 효력과 선의취득누구든지 증서의 적법한 소지인에게 증서의 반환을 청구할 수 없다다만소지인이 증서를 취득할 때에 양도인에게 권리가 없음을 알았거나 중대한 과실로 알지 못한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동전'이란 말을 쓰지 않았고 대신 '배서의 자격 수여력'을 다시 밝혀 주었다. '동전'이란 말을 쓰지 않고도 얼마든지 뜻을 전달할 수 있다. 앞 조의 제목을 되풀이해주면 된다. 한자를 한글로 바꾸는 게 능사가 아니다. 이렇게 뜻을 알기 쉽게 한 민법개정안은 국회에서 처리하지 않아 자동폐기되었다. 법을 국민이 알기 쉽게 개선하는 게 이토록 어렵단 말인가. 이제 바뀔 때도 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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