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이 모르게 돼 있어서는 안 된다
유언을 증서로 남긴 사람이 유언증서를 고의로 훼손했을 때는 유언을 철회한 것으로 본다는 민법 규정이 있다. 유언증서가 효력을 지니려면 유언자가 증서를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이 규정은 민법 제1110조로서 다음과 같다.
위는 편의상 한글로 제시된 것이고 공식적으로는 다음과 같다.
제1110조는 민법이 제정되던 1958년의 조문 그대로이다. 개정된 적이 없다. 여기서 '파훼'라는 말이 눈길을 끈다. 평소에 별로 듣지 못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파훼'가 잘 쓰이지 않아 무척 낯설게 느껴지지만 과거로 돌아가면 '파훼'는 널리 쓰였던 말이다. 신문기사 검색에 따르면 일제강점기에는 '파훼'가 여간 자주 쓰이지 않았다. 그러나 광복 후에 차츰 쓰임이 줄어들더니 1960년대부터는 급격히 사용 빈도가 줄었다. 1980년대 초반을 마지막으로 그 후로는 아예 사용 예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유일하게 민법 제1110조에 '파훼'가 남아 있다. 민법이 1950년대에 제정됐기 때문이다. 1950년대만 해도 '파훼'는 제법 쓰였던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파훼'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파훼'는 사실상 사어나 마찬가지다. 과연 2019년 법무부가 제20대 국회에 제출한 민법개정안은 제1110조를 다음과 같이 고쳐서 제시했다.
'파훼한'을 '파손하거나 훼손한'으로 고쳤다. '파손하다', '훼손하다'는 누구나 아는 말이니 제1110조는 무척 알기 쉬워졌다. 그러나 이 민법개정안은 국회에서 처리되지 않아 임기 만료와 함께 폐기되고 말았다. 제21대 국회에서는 아예 민법 개정은 시도조차 되지 않았고 결국은 지금도 '파훼'는 민법 제1110조에 그대로 남아 있다.
법은 문화유산이 아니다. 지금 사용하는 것이다. 시대에 맞지 않으면 과감하게 고쳐야 한다. 법은 만인이 지키라고 있는 것인데 극소수의 법률 전문가만 이해하는 말로 되어 있는 것이 옳은가. 국민을 소외시켜서 되겠는가. 법을 알기 쉽게 바꾸는 일에 국민이 관심을 가져야 한다. 법은 국민인 나를 위해 있는 것인데 내가 모르게 돼 있어선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