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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중 Oct 07. 2024

정돈, 실당

이대로 좋은가

상법은 1962년 1월 20일 법률 제1000호로 제정되었고 1963년 1월 1일 시행되었다. 어언 60년이 넘었다. 상법은 1960년대초에 제정된 법답게 사용된 단어 중에 옛날 어투 단어가 꽤 들어 있다. 상법 제520조에 나오는 정돈실당도 그런 예다. 상법 제520조는 주식회사의 해산에 관한 조항으로 주주가 회사의 해산을 법원에 청구할 수 있는 경우에 대해 규정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상법

제520조(해산판결) ①다음의 경우에 부득이한 사유가 있는 때에는 발행주식의 총수의 100분의 10 이상에 해당하는 주식을 가진 주주는 회사의 해산을 법원에 청구할 수 있다.

1. 회사의 업무가 현저한 정돈상태를 계속하여 회복할 수 없는 손해가 생긴 때 또는 생길 염려가 있는 때

2. 회사재산의 관리 또는 처분의 현저한 실당으로 인하여 회사의 존립을 위태롭게 한 때


상법은 제정될 때 한자로 적혔다. 그래서 정돈, 실당 停頓, 失當이었다. 물론 지금도 공식적으로는 停頓, 失當이다. 시대적 흐름이 한글 전용이니 한글로 보여주고 있을 뿐 엄연히 한자로 돼 있다. 그런데 이 정돈整頓이 아니고 停頓이다. "정리정돈이 잘 돼 있다."라고 할 때의 '정돈'은 整頓이지 停頓이 아니다. 그럼 '정돈(停頓)'은 무슨 뜻일까. 정리정돈의 '정돈(整頓)'과는 뜻이 사뭇 다르다.  정돈(整頓)은 '어지럽게 흩어진 것을 규모 있게 고쳐 놓거나 가지런히 바로잡아 정리함'이란 뜻이고 '정돈(停頓)'은 '침체하여 나아가지 아니함'이란 뜻이다. 문제는 '침체하여 나아가지 아니함'이란 뜻의 '정돈(停頓)'을 사람들이 거의 모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돈(停頓)'이란 말은 상법이 제정되던 1960년대초에는 상당히 널리 쓰였다. '휴전회담이 停頓된 상태이다', '남북회담은 停頓된 상태에 빠져 있다'와 같이 쓰였다. 이때의 정돈(停頓)은 '교착'이나 '정체'의 뜻이었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멈추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점차 쓰임이 줄더니 1993년에 마지막으로 신문기사에 나타나고는 그 후로는 신문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사실상 사어가 되고 만 것이다. 그런데 이 '정돈(停頓)'이 상법에는 여전히 남아 있다.


'실당(失當)' '정돈(停頓)'과 마찬가지다. '실당(失當)'은 '이치에 맞지 아니하고 당연한 도리(道理)에 어그러짐'이라는 뜻이다. '실당(失當)'은 '정당(正當)'의 반대되는 말로 '부당(不當)'과 동의어다. '실당(失當)'은 일제강점기에는 아주 널리 쓰였던 말인데 1950년대와 1960년대까지만 해도 더러 쓰였다. '실당한 비난'과 같은 용례로 쓰였다. '부당한 비난'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1979년을 끝으로 신문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사어가 된 것이다. 역시 이 '실당(失當)'도 상법 제520조에 남아 있다. 


'실당(失當)', '정돈(停頓)'은 모두 일본어 단어다. 그래서 일제강점기에 널리 쓰였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로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정돈(停頓)'은 정체로, '실당(失當)'은 부당으로 대체되었다. 지금 살아 있는 사람 중에서 '실당(失當)', '정돈(停頓)'을 아는 사람은 일부 연로한 이들뿐일 것이다. 누가 그런 말을 쓰나. 요즘 젊은이들에게 '실당(失當)', '정돈(停頓)'이 가당키나 한 말인가. 상법은 정비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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