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알기 쉬운 말을 쓰면 안 되나
'사퇴하다'라는 말이 있다. 한 국어사전은 "어떤 일을 그만두고 물러서다."라고 뜻풀이했다. 다른 국어사전은 "직책을 그만두고 물러남."과 "요구나 제의 따위를 사양하여 받아들이지 않음."이라 뜻풀이하고 있다. 공통적인 것은 '일'이나 '직책'을 그만두고 물러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보통 '회장직에서 사퇴한다', '의원직을 사퇴했다' 등과 같이 '사퇴'라는 말을 쓴다. '회장직'이나 '의원직'은 그야말로 '직책'이다.
그런데 '권리를 사퇴한다'라고도 할 수 있을까. 우리 법조문에 그런 표현이 있다. 민법 제927조는 다음과 같다.
민법 제927조의 뜻은 친권자는 정당한 사유가 있을 때에는 법원의 허가를 얻어서 대리권과 재산관리권을 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가 보호하고 있는 자녀에 대해서 그 자녀를 대리할 수 있는 권리, 자녀의 재산을 관리할 수 있는 권리를 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무엇이 정당한 사유가 될 수 있는지는 법원이 판단할 것이다.
그런데 법조문의 표현은 '대리권과 재산관리권을 사퇴할 수 있다'이다. 여기서 '사퇴하다'가 적절한지 의문이 든다. 피치 못할 법률 용어라면 써야겠지만 '사퇴하다'가 법률 용어일까. '대리권', '재산관리권'은 법률 용어임에 의문이 없지만 '사퇴하다'까지 법률 용어로 보기는 어렵다. 국어사전에 '사퇴하다'는 법률 용어라 되어 있지 않다. 일테면 '청구하다'는 일상적 의미 외에 법률 용어로서의 의미가 있다. 그러나 '사퇴하다'는 그렇지 않다. 법률 용어가 아니라면 가장 문맥에 맞는 단어가 쓰여야 하지 않을까. 위 제1항에서 '재산관리권을 사퇴할'보다는 '재산관리권을 포기할', '재산관리권을 버릴', '재산관리권을 내려놓을' 등이 더 문맥에 맞아 보인다.
우리 사회에서 법조문에는 딱딱한 한자어를 써야 한다는 의식이 뿌리 깊은 것 같다. 거기서 벗어날 수는 없을까. 우리 민법은 일본 민법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는데 민법 제927조에 해당하는 일본 민법 조문은 다음과 같다.
여기서 우리 민법의 '사퇴할'에 대한 일본 민법의 표현은 '辞する'임을 볼 수 있다. 일본어 '辞'는 버린다, 내버린다는 뜻이다. 따라서 굳이 우리 민법에서 '사퇴(辭退)'라 하지 않아도 되었는데 엉뚱하게 '사퇴(辭退)'라 한 것이다. 그 결과 '재산관리권을 사퇴할 수 있다'라는 법조문을 읽고 사람들은 어딘가 어색하게 느끼고 무슨 뜻인지 의문을 갖게 된다.
그리고 우리 민법에 '권리를 포기하다'라는 말이 이미 쓰이고 있기도 하다. 민법 제1108조 2항에 "권리를 포기하지 못한다"라는 구절이 있다. 민법 제1108조는 다음과 같다.
1958년 민법을 제정할 때 별 생각 없이 만든 표현을 덮어놓고 지키고 옹호하기보다는 지금 사용자들에게 더 친숙하고 이해하기 쉬운 표현이 있다면 그것으로 바꾸려는 전향적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법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나. 법의 적용을 받는 온 국민을 위해 있는 거 아닌가. 국민에게 생소하고 어색한 느낌을 주고 법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는 표현을 고수해야 하나.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