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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중 Oct 17. 2024

맞춤법은 상식이다

법은 어문규범을 어겨도 되나

'받다'라는 동사가 있다. 이 단어를 쓸 때 '받아'라고 하는 것이 맞나? '받어'라고 하는 것이 맞나? 이 질문을 받으면 초등학생이라도 '받아'가 맞다고 할 것이다. '받어'는 틀렸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 민법에는 '받어'라는 틀린 말이 떡하니 들어 있다. 다음과 같다.


민법

제195조(점유보조자) 

가사상, 영업상 기타 유사한 관계에 의하여 타인의 지시를 받어 물건에 대한 사실상의 지배를 하는 때에는 그 타인만을 점유자로 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받아'라고 된 조문도 있다. 다음을 보자.


민법

제484조(대위변제와 채권증서, 담보물) ①채권전부의 대위변제를 받은 채권자는 그 채권에 관한 증서 및 점유한 담보물을 대위자에게 교부하여야 한다.

②채권의 일부에 대한 대위변제가 있는 때에는 채권자는 채권증서에 그 대위를 기입하고 자기가 점유한 담보물의 보존에 관하여 대위자의 감독을 받아야 한다.


왜 어떤 조에는 '받어'라 되어 있는데 다른 조에는 '받아'라 돼 있나? 무슨 이유가 있나? 합당한 까닭이 있을 리 없다. '받아'가 맞고 '받어'는 틀렸을 뿐이다. 이런 오류는 다른 법에도 들어 있다. 다음을 보자.


형법

제269조(낙태) ①부녀가 약물 기타 방법으로 낙태한 때에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개정 1995. 12. 29.>

②부녀의 촉탁 또는 승낙을 받어 낙태하게 한 자도 제1항의 형과 같다. <개정 1995. 12. 29.>


형법

제270조(의사 등의 낙태, 부동의낙태) ①의사, 한의사, 조산사, 약제사 또는 약종상이 부녀의 촉탁 또는 승낙을 받어 낙태하게 한 때에는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개정 1995. 12. 29.>


형사소송법

제210조(사법경찰관리의 관할구역 외의 수사) 사법경찰관리가 관할구역 외에서 수사하거나 관할구역 외의 사법경찰관리의 촉탁을 받어 수사할 때에는 관할지방검찰청 검사장 또는 지청장에게 보고하여야 한다. (이하 생략)


민법 제195조에는 '지시를 받어'가 있고 형법 제269조와 제270조에는 '승낙을 받어'가 있다. 형사소송법에는 '촉탁을 받어'가 있다. 만일 지금 민법, 형법, 형사소송법을 만들었다면 이런 표현이 쓰일 리가 없다. 아무도 '받어'라고는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법은 1958년에, 형법은 1953년에, 형사소송법은 1954년에 제정되었다. 1950년대에는 '받어'는 틀리고 '받아'가 맞다는 의식 자체가 희미했던 것이다. '받어'와 '받아'가 뒤죽박죽 섞여 쓰였다. 일상생활의 언어는 물론이고 법조문에서까지 그랬다. 


요컨대 1950년대는 말이 혼란스러운 시대였다. 그런데 1950년대에는 아직 표준어, 맞춤법 같은 어문규범에 대한 의식이 미약해서 그랬다손 치자. 왜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어문규범에 어긋난 표현을 그대로 두고 있나. 법은 어문규범 위에 있나. 법은 어문규범을 어겨도 되는가.  말에 대해 이다지도 무심할 수 있나. 맞춤법은 상식이요 최소한의 규범이다. 상식을 회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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