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문화해설사의 해설을 들으며 창경궁을 둘러보았다. 해설사의 역사 지식이 워낙 해박하고 또 해설하는 말이 빨라 채 다 머리에 넣을 수 없었다. 아마 반의 반도 기억에 담지 못한 듯하다. 그러나 가기 전에 궁금하게 여겼던 것들을 대체로 거의 다 해소할 수 있었다.
우선 오늘 가면 의문을 풀려고 한 것들이 몇 있었다. 도대체 왜 창경궁을 짓게 되었을까 하는 것이다. 한양 사대문 안에는 경복궁, 창덕궁이 이미 있었다. 거기다 또 창경궁을 지었으니 말이다. 후일에는 경희궁, 덕수궁까지 궁으로 역할을 했으니 좁은 사대문 안에 궁이 너무 많았다. 광해군 때는 경희궁과 함께 인경궁, 자수궁까지 지었다는 기록이 있으니 17세기 한양은 온통 궁이었다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창경궁은 성종이 세웠다고 한다. 할머니인 정희왕후와 윗대 안순왕후, 소혜왕후 등 모셔야 할 어른들이 많았고 그들을 위해 세운 궁이 창경궁이었다는 것이다. 어쨌든 창덕궁 바로 옆에 창경궁은 세워졌고 창경궁은 행사용으로 주로 쓰였을 뿐 정사는 이곳에서 별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설명을 들었다. 창덕궁에서 행사를 치르기에는 뭔가 부족했을까.
성종 때 세워진 창경궁은 임진왜란 때 다 타버렸고 광해군 때 다시 지어졌다 했다. 창경궁의 정전인 명정전은 광해군 때 건물이고 그게 지금도 남아 있어 국보로 지정돼 있다. 그런데 그 옆 건물인 문정전의 역사가 흥미롭다. 문정전도 광해군 때 지어졌는데 일제가 헐어버렸단다. 지금의 건물은 1986년에 지어진 건물이라는 것이다. 불과 40년도 안 됐다. 그런데 2006년 4월에 한 노인이 이곳에 들어와 불을 질렀으나 조금만 타고 곧 진화됐다. 그런데 그는 재판에서 집행유예를 받고 풀려났고 불과 2년도 채 안 돼서 숭례문에 또 불을 질러 이번에는 숭례문이 홀랑 다 타버렸다. 그는 다시 재판에 넘겨져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는데 2018년 만기출소했단다. 조금만 타고 만 문정전은 1986년에 지어진 건물이지만 거의 다 타버린 숭례문은 국보1호 아닌가. 뭐라 말할 수 없는 비극이었다.
창경궁은 사도세자와 관계가 깊다. 그가 창경궁에서 죽었기 때문이다. 뒤주에 갇혀서 죽었는데 그 뒤주가 창경궁 마당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남편을 잃은 혜경궁 홍씨가 한중록을 집필한 곳도 창경궁이었다. 정조의 아들 순조와 그의 정비 순원왕후 이야기도 자못 흥미로웠다. 순원왕후는 2남 3녀를 낳았다. 다복했다. 그러나 다섯 자녀가 모두 일찍 죽었다. 막내딸인 덕온공주가 그중 가장 오래 살았는데 스물두 살에 친정인 창경궁에 왔다가 비빔밥을 먹은 게 급체해서 죽었다니 자식을 모두 먼저 보낸 순원왕후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 그런데 덕온공주가 조선왕조의 마지막 공주였단다. 고종이 그렇게 아꼈다는 덕혜옹주는 옹주였지 공주가 아니었던 것이다. 왕비와 후궁은 자식의 지위까지 달리 만들었다.
어린 시절 생각이 난다. 그땐 창경원이었다. 일제는 창경궁에 있던 수많은 전각을 허물고 창경원으로 격하했던 거다. 그래서 창경원에 동물원, 식물원이 생겼다. 시골사람들이 서울에 오면 반드시 찾는 곳이 창경원이었다. 지금은 제법 고궁의 모습을 되찾았다. 으뜸가는 명정전이 광해군 때 모습 그대로 있다니 여간 다행이지 않다. 일제가 차마 명정전만은 어찌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창경궁에서 많은 궁중비사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