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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 표준어는 모순

표준은 복수일 수 없다

by 김세중

이른바 4대 어문규정이라는 게 있다. 한글 맞춤법, 표준어 규정, 외래어 표기법 그리고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이다. 이 넷 중에서 표준어 규정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허탈하기까지 하다. 속 빈 강정이기 때문이다. 표준어 규정이 없으면 뭐가 문제가 될까. 표준어는 국어사전에 다 수록이 되어 있으므로 제1항부터 제26항까지로 이루어진 표준어 규정은 국어사전이 자리를 잡게 된 후로는 남아 있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누가 이에 반론이 있다면 해보라.


제26항까지 있는 표준어 규정의 마지막 제26항이 "한 가지 의미를 나타내는 형태 몇 가지가 널리 쓰이며 표준어 규정에 맞으면, 그 모두를 표준어로 삼는다."이다 그 제목을 복수 표준어라 달았다. 일테면 '자물쇠, 자물통', '옥수수, 강냉이', '신발, '은 다 표준어라는 것이다. 이걸 굳이 '복수 표준어'라 이름을 붙일 필요가 있을까. 자물쇠자물통, 옥수수강냉이, 신발은 형태가 다르고 의미가 거의 같은 말이다. 다 사용되는 말이니 다 표준어임은 당연하다. 이걸 굳이 규정으로 선언할 필요가 없다. 어느 하나만 맞고 다른 하나는 틀리다고 해서는 안 된다. 거기까지는 잘했다. 옥수수강냉이는 뜻만 같지 엄연히 형태가 다르고 어원이 다르다.


그런데 예를 들어 남비냄비는 경우가 다르다. 뜻만 같을 뿐 아니라 형태도 비슷하고 어원이 같다. 형태가 살짝 다를 뿐이다. '냄비'의 첫 음절 모음은 ''고 '남비'의 첫 음절 모음은 ''다. 이럴 때는 어느 하나만 표준으로 삼아야 마땅하다. 그리고 '냄비'와 '남비' 중에서 '냄비'가 표준이다. 만일 '냄비', '남비'를 모두 표준으로 인정한다면 표준이 설 자리는 없어진다. 둘 다 써도 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원이 같은 말인데 형태가 다를 때는 더 널리 쓰이는 것을 표준으로 삼고 그렇지 않은 것은 표준이 아닌 것으로 간주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의사소통이 잘 된다. 표준어가 필요한 게 바로 그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학교'나 '핵교'나 다 표준어라면 말이 얼마나 혼란스럽겠는가. '핵교'가 입에 밴 사람이 극히 일부 있겠지만 그래도 '학교'가 훨씬 더 보편적으로 널리 쓰이니 '학교'를 표준어로 삼는 것 아니겠는가.


'자장면'이냐 '짜장면'이냐가 오래 논란의 대상이 돼 왔다. '자장면'이 오래도록 표준어로 사전에 올라 있었는데 이에 대한 반발이 너무나 심했다. '자장면'이라 발음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결국 '짜장면'도 표준어라는 발표가 났다. 이른바 '자장면'과 '짜장면'은 복수 표준어가 됐다. 비유하자면 '핵교'를 표준어로 삼아 왔는데 누가 '핵교'라 하냐며 '학교'를 표준어라고 하라고 하니 표준어를 '핵교'에서 '학교'로 바꾸지 않고 '핵교'는 여전히 표준어인데 '학교'도 표준어라고 한 셈이 됐다. 물론 실제로 '핵교'는 표준어였던 적어 없다. '학교'가 표준어였다. 비유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표준어를 '자장면'에서 '짜장면'으로 바꾸지 않고 '자장면'은 여전히 표준어인데 '짜장면'도 표준어라고 했다. '자장면'도 맞고 '짜장면'도 맞으니 어느 쪽을 쓰는 사람으로부터도 욕 먹을 일이 없는지 모르겠으나 표준은 없다. 표준은 복수여서는 안 되는데 모두 표준이라고 했다. 자장면'을 쓰는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 그들까지 고려하고 배려하나.


비슷한 예는 또 있다. radar의 한글 표기는 '레이더'였다. 그런데 이는 처음부터 오류였다. radar의 영어 발음은 [ˈreɪdɑː(r)]여서 '레이'일 수 없었다. '레이'여야 했다. 실제로 우리말에서도 '레이다'가 널리 쓰였다. 이걸 착오를 저질러 '레이더'가 표준이라고 정했다. 이를 바로잡으려는 전문가가 있었다. 전 한국항공대 곽영길 교수다. 그는 레이다 전문가였다. radar의 외래어 표기가 '레이더'로 잘못되어 있는 현실을 바로잡고자 치열하게 노력했지만 결실은 좀 엉뚱했다. 어문당국은 radar의 외래어 표기를 '레이더'에서 '레이다'로 바꾸지 않고 '레이더'도 표준어, '레이다'도 표준어라고 했다. 복수 표준어라 할 게 아닌 걸 복수 표준어라 한 것이다.


복수로 해서는 안 될 말을 복수 표준어로 한 예는 또 있다. 알파벳 r의 한글 표기다. 이게 원래 '아르'였다. 어느 순간 국어사전은 희한한 결정을 했다. '아르' 말고 ''도 표준으로 했다. 이런 말이야말로 어느 하나를 표준으로 삼아야 할 텐데 '아르'도 표준어, ''도 표준어로 한 것이다. 지금까지 저질러 온 잘못을 스스로 인정할 용기가 없으니 둘 다 표준으로 한 것이다. 뭘 어쩌자는 것인가. 짜장면, 레이다, 이 표준어여야지 짜장면자장면이 다 표준어, 레이다레이더도 다 표준어, 아르 다 표준어라니 황당하다. 어문당국이 오히려 언어 혼란을 부추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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