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전축인가 전환인가
한 유력지는 외래어를 참 좋아한다. 한동안 빅샷이란 말을 즐겨 써서 어리둥절했는데 오늘은 1면 톱의 제목에 '트림프의 러시아 피벗'이라고 해서 필자를 혼란에 빠뜨렸다. 신문은 고등학생(또는 중학생) 정도 수준에 맞게 단어와 문장을 쓰는 걸 철칙으로 삼는다고 오래전부터 들어왔다. 신문은 학술논문이 아니기 때문에 독자의 수준을 그 정도에 맞춘다는 뜻이다. 신문이란 그야말로 대중이 읽는 것이므로 난해한 말, 현학적인 말은 피하는 게 보통이다. 그런데 트림프의 러시아 피벗이라니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다. 신문사에서도 알았나 보다. 그냥 트림프의 러시아 피벗이라고 하면 무슨 뜻인지 모를 사람이 많을 것 같아 피벗 아래에 pivot. 중심축 전환이라고 자그맣게 썼다. 나름 친절은 베풀었지만 그렇다고 뜻이 선명하게 이해될까.
우리나라 신문에 피벗이란 말이 쓰이기 시작한 것은 사실 오래다. 1959년 7월 27일 조선일보에 피벗이란 말이 나온다. 농구 기사에서 '쎈터 피벗 푸레이'라고 했다. 이렇듯 농구 기사에서 피벗이란 말은 오래 전부터인데 실은 농구뿐 아니다. 핸드볼 기사에서도 피벗은 자주 나왔다. 장신 선수가 피벗 즉 회전축 역할을 한다. 한쪽 발을 고정하고 몸을 움직여 원하는 방향으로 볼을 뿌리는 것이다. 상대 팀 선수들은 공이 어디로 날아올지 몰라 허둥댈 수밖에 없다. 피벗은 장신 선수의 특권이다.
농구, 핸드볼 등에서 주로 쓰이던 피벗이 골프에서도 쓰이기 시작했다. 골프에서는 리버스 피벗, 역 피벗 등으로 쓰였다. 체중이 잘못 쏠릴 때 리버스 피벗, 역 피벗이라 해서 이는 골프에서 피해야 할 몸 움직임이다.
운동에서 많이 쓰이던 피벗은 증권 시장의 선물 거래 관련 기사에서 부쩍 쓰이기 시작했다. 피벗 포인트는 중심 가격 수준으로 중심 가격은 시장의 심리적 균형점으로 간주된다. 한편 피벗은 전자제품 모니터의 새로운 기술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이기 시작했다. 가로 세로 마구 휘어지는 모니터는 피벗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때의 피벗은 그야말로 회전축을 가리킨다. 회전축을 중심으로 아무 방향으로나 마구 모니터를 돌릴 수 있다. 이상에서 본 모든 피벗들은 모두 회전축, 중심축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트럼프의 러시아 피벗에서 피벗은 회전축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때의 피벗은 방향 전환을 의미한다. 전환에 초점이 놓여 있다. 러시아 피벗은 러시아로 방향을 돌린다, 러시아와 가까워진다는 뜻이다. 그런데 과연 피벗에 그런 뜻이 있나? 피벗이 회전축, 중심축 자체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사물의 움직임, 변화를 가리키는 게 맞나?
'트럼프의 러시아 밀착, 다음은 美.北 밀착 우려'라고 하면 밀착이 반복되니 반복을 피하기 위해 앞에 나오는 밀착은 피벗이라 쓴 걸까. 의문이 떠나지 않는다. 신문이 대중들 사이에서 널리 쓰이는 말을 따라서 쓰는 것은 이해하고도 남으나 앞장서서 새로운 말, 새로운 뜻을 퍼뜨리고 따르라는 것은 온당해 보이지 않는다. 피벗은 회전축, 중심축인가 밀착, 전환인가. 신문이 언어생활을 혼란에 몰아넣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좀 더 신중한 어휘 선택을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