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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탐방록

홍유릉을 찾아서

서얼 차별이 극심했다

by 김세중

사진이 남아 있는 조선왕조의 임금은 고종과 순종뿐이다. 헌종이나 철종의 사진을 본 적이 있는가. 없을 것이다. 사실 고종과 순종의 사진도 그리 많이 남아 있진 않은 것 같다. 어떻든 조선에 27명의 왕이 있었지만 고종과 순종은 그 마지막 왕들로서 무척 가깝게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그리고 구한말에 이 땅에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나. 고종과 순종이 관여되지 않은 일이 별로 없어 보인다. 그런 고종, 순종이지만 아직 그들이 묻힌 능엘 가보지 못하다가 오늘 드디어 가보았다.


뜻밖에 고종과 순종의 능은 쉽게 갈 수 있었다. 경춘선 전철 금곡역에서 걸어서 불과 10분 거리에 있었다. 진작 알았더라면 좀 더 일찍 와볼걸...... 고종의 능이 홍릉, 순종의 능이 유릉이라 합해서 홍유릉이라 불린다. 그리고 홍유릉 가까이에는 고종의 다른 자녀들과 후궁들의 묘도 있었다. 영친왕의 묘인 영원, 영친왕의 아들 이구(李玖)의 묘인 회인원, 덕혜옹주묘, 의친왕묘 등등이 그것이었다. 홍유릉은 거대한 가족묘지인 셈이었다.


금곡역에서 홍유릉을 향해 완만한 내리막길을 걷다 보니 사거리에 이르렀고 건너편에 묘한 건축물이 눈길을 끌었다. Remember 1910이었다. 직감적으로 1910년 한일합병을 잊지 말자는 뜻 같았다. 과연 그곳은 남양주 출신 갑부 이석영을 기리는 시설물이었다. 거부였지만 재산을 독립운동에 다 바쳤고 말년에 중국 상해에서 굶어 죽었단다. 그런 훌륭한 인물을 기리는 것은 칭송할 일이나 왜 그 이름이 Remember 1910인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 나라가 언제부터 영어가 공용어가 되었나. 지방자치단체의 일탈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시설은 지하1층에 있었고 근사하게 잘 꾸며져 있었다. 시민들을 위한 멋진 휴식공간이기도 했다.


이제 홍유릉으로 향한다. 정문 맞은편에 홍릉.유릉역사문화관이 있어 먼저 그곳에 들렀다. 능을 둘러보기 전에 사전 학습을 해두는 것이다. 간단히 전시물을 훑어보고 홍유릉에 들어섰다. 여기서 선택을 해야 한다. 오른쪽으로 순종 능인 유릉을 먼저 볼 것이냐 왼쪽으로 고종 능인 홍릉을 먼저 볼 것이냐. 유릉을 택했다. 입구에 재실 공사가 한창이었다. 그리고 향로가 나타났다. 좌우에는 석물들이 도열해 있었다. 그 끝에는 정자각이 아니라 큼직한 한옥 건물이 서 있었다. 석물들은 말, 낙타, 해태, 사자, 코끼리, 기린의 순으로 그리고 사람은 무석인, 문석인 순으로 기립해 있었다. 낙타, 코끼리, 기린 등을 우리 조상들은 어떻게 알았을까. 조선에 없었을 텐데 말이다. 수많은 조선 왕릉의 전형적 모습과는 사뭇 다른 이런 모습은 고종과 순종이 대한제국의 황제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이전의 임금들과는 뭐가 달라도 다른 거다. 능이 조성됐을 때는 국권을 이미 잃은 뒤였음에도 이렇게 했다는 게 신기하기만 하다. 고종은 1919년, 순종은 1926년에 승하하고 능을 조성하지 않았나.


순종의 능인 유릉은 봉분이 잘 보이지 않았다. 가까이 가면 당연히 보이겠지만 출입금지니 갈 수가 없다. 되돌아나오다가 잠깐 봉분이 조금 보이기에 사진을 찍었다. 유릉에는 순종만 묻힌 게 아니다. 순종의 두 황후인 순명황후, 순정황후가 함께 같이 묻혀 있단다. 이어서 고종의 능인 홍릉으로 향했다. 도중에 연못이 있었다. 홍릉 연지였다. 연못이 아주 큼직하고 우아했다. 연못 한가운데에 언덕이 솟아 있었고 언덕 위에 아름드리나무 두 그루가 운치를 돋웠다. 홍릉 앞에 이르렀다. 유릉처럼 역시 향로 좌우로 석물들이 도열해 있었고 양식은 유릉과 흡사했다. 1895년 명성황후는 시해됐고 청량리 홍릉에 묻혔다가 1919년 고종이 세상을 뜬 뒤 금곡의 홍릉에 묻힐 때 합장됐다고 한다.


홍릉 부근에 영원, 회인원쪽으로 갈 수 있는 쪽문이 있었다. 그리로 나와 영원으로 향했다. 영원은 영친왕과 부인 이방자 여사가 합장된 묘이다. 회인원은 두 사람의 아들인 이구가 묻힌 묘이고. 영친왕은 의민황태자, 이방자 여사는 의민황태자비다. 영친왕이 누구인가. 1897년에 태어난 그는 1907년에 황태자로 책봉됐다. 배다른 형인 순종이 황제에 오르자 이복동생이 황태자가 된 것인데 그러니 실은 황태제라 해야겠다. 영친왕은 이름이 이은(李垠)이었다. 그에게는 20년 연상의 이복형이 또 있었다. 의친왕 이강(李堈)이었다. 왜 이강을 제치고 이은이 황태자가 되었나. 영친왕의 어머니는 순헌황귀비 엄씨로 정비였지만 의친왕의 어머니 장씨는 한낱 궁인에 지나지 않았다. 그 신분 차이가 영친왕과 의친왕의 신분 차이로 이어졌다.


영친왕이 열세 살 때 나라가 소멸했지만 일제는 그를 일본으로 데려가 교육시켰다. 일본육사를 졸업했고 일본 왕족의 딸과 결혼까지 했다. 그녀가 이방자 여사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들도 있었다. 하나는 일찍 죽고 오래 살아남은 이가 이구(李玖)인데 1931년생인 그는 일본에서 태어났고 미국으로 유학 가서 MIT에서 건축을 공부했다. 미국에서 연상의 백인 여성 줄리아 멀록과 결혼했지만 결혼은 길게 가지 못했고 이혼했다. 영친왕은 1970년, 이방자 여사는 1989년, 이구는 2005년에 각각 세상을 떠났다.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는 말년에 한국에 살다가 죽었지만 아마 한국말을 그리 썩 잘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아들 이구도 비슷했을 것 같다.


영친왕 묘인 영원, 이구의 묘인 회인원을 나와 덕혜옹주와 의친왕이 묻힌 곳으로 향했다. 먼저 덕혜옹주의 사진이 길게 전시돼 있었다. 그녀는 아버지 고종이 환갑이던 1912년에 태어났다. 고종이 대단히 이뻐했다고 한다. 딸을 위해 유치원까지 세웠고 유치원 때 찍은 사진이 남아 있었다. 1925년 덕혜옹주는 일본으로 유학 갔고 일본사람과 결혼했으나 결혼생활이 순탄치 못했다. 급기야 정신병까지 얻었다 한다. 이혼했고... 숱한 사진들이 10대 때 그녀가 무척 영민했음을 알게 해주었다. 덕혜옹주의 사진은 참 많았지만 이어서 나오는 의친왕의 사진은 몇 장 되지 않았다. 왜 그럴까. 의친왕은 1877년에 태어나 1955년에 별세했으니 제법 장수한 편이지만 비운의 왕자였다. 의친왕은 스무 살 전후 때 아버지 고종이 미국 유학을 보냈단다. 그러나 별로 대접을 받지 못했다. 어머니가 궁인 출신의 귀인 장씨였기 때문이다. 의친왕은 부인 외에도 첩이 많았다. 그러니 자녀가 많을 수밖에. 공식적으로 확인된 의친왕의 자녀만도 12남 9녀라고 한다. 스물한 명이라는 것이다. 놀랍게도 홍릉.유릉역사관의 황실가계도에는 의친왕의 자녀가 단 한 명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자녀가 아예 없는 걸로 돼 있다. 의친왕의 아들 12남 중에는 차남 이우(李鍝)도 있는데 이우는 불행히도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서 원자폭탄을 맞아 죽고 말았다.


의친왕 이강에 대한 심한 차별은 무덤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의친왕 묘에는 표석이 없다. 누가 죽은 묘인지를 밝히는 비석이 없는 것이다. 이복 여동생 덕혜옹주의 묘가 가까이에 있는데 덕혜옹주 묘에는 표석이 세워져 있는데 말이다. 시골의 이름 없는 양반들도 죽으면 누가 적었는지를 비석에 새겨 세워둔다. 그런데 고종황제의 아들 의친왕의 무덤에는 표석이 없다. 썰렁하기 짝이 없는 의친왕의 묘를 뒤로 한 채 발걸음을 돌렸다. 서얼 차별이 원체 심한 조선이었지만 봉건 시대가 끝난 지 오래인 지금도 의친왕과 그 자녀에 대한 차별은 계속되고 있었다. 이런 차별은 이제 거둘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 있었던 사실 그대로 기록해두는 것이 옳지 않은가.


다시 쪽문을 통해 홍릉으로 들어갔다. 아까 보았지만 또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홍릉 연지는 다시 봐도 아름다웠다. 정문으로 나온 다음 이제는 후궁들의 묘로 향했다. 수인당묘, 수관당묘, 귀인장씨묘, 삼축당묘, 광화당묘가 차례로 있었다. 수안당 김씨는 의친왕의 두 번째 후실이고, 수관당 정씨는 의친왕이 첫 번째 후실, 귀인 장씨는 의친왕의 생모다. 그녀는 궁인의 신분일 때 의친왕을 낳았고 이후 숙원을 거쳐 귀인으로 추증되었단다. 궁인이 얼마나 하찮은 신분이었길래...... 삼축당 김씨는 고종의 후궁, 광화당 이씨도 고종의 후궁이었다. 놀랍게도 광화당 이씨는 1914년 고종의 아들 이육(李堉)을 낳았다고 안내문에 적혀 있었다. 그러나 두 돌도 채 되지 않아 뇌수막염으로 죽었다니 별 의미는 없다 하겠다.


1897년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스스로 황제에 올랐지만 이미 국운은 쇠한 뒤였다. 1910년 강제합병이 되었고 1919년 1월 21일 67세에 갑자기 세상을 떴는데 사인은 의문투성이란다. 순종은 아버지도 훨씬 이른 나이인 52세에 세상을 떴다. 심장마비였다고 한다. 돌이켜 보면 고종은 군왕으로서 나라를 통치할 준비가 안 된 채 보위에 올랐다. 마땅히 왕위에 앉힐 사람을 아무리 찾아도 잘 안 보이니 촌수 먼 왕족 소년 하나를 찾아냈고 그가 국왕 수업을 제대로 받았을 턱이 없다. 얼떨결에 왕이 됐다. 아버지가 수렴청정한 것은 당연했고. 아버지가 물러나자 이번엔 부인이 정사를 주도했다. 그러다 비참하게 죽고 말았고... 뒤늦게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의욕을 펴보였지만 이미 늦었다. 국운이 그것뿐이었을 것이다. 내년이면 순종 승하 100주년이다. 암울했던 시기는 다 과거지사가 됐다. 다음 달이면 광복 80주년을 맞는다. 오로지 밝은 미래를 위해 힘을 쏟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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