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8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남아 있는 일본어 흔적
아침 신문에 커다랗게 배임죄가 폐지된다는 기사가 떴다. 배임죄는 형법에 규정되어 있는 죄다. 형법 제355조에 배임죄가 무엇이며 어떻게 처벌하는지가 밝혀져 있다. 그런데 정부여당이 배임죄를 폐지하기로 방침을 정했단다. 다수 의석을 가지고 있는 여당이 이런 방침을 확정했으니 앞으로 형법이 개정되어 배임죄는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배임죄는 형법에 어떻게 규정되어 있는지 보자.
형법 제355조는 다음과 같다.
배임죄를 폐지한다 함은 형법 제355조 제2항을 삭제한다는 것인데 이를 지켜보는 필자로서는 쓸쓸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 이유를 말해 보련다. 형법 제355조 제2항에 들어 있는 '임무에 위배하는 행위'는 지난 1953년 형법이 제정된 이래 지금까지 줄곧 유지되었던 표현인데 표현 자체가 한국어가 아니다. 말이 안 되는 표현이다. 위배하다는 타동사이므로 임무를 위배하는 행위라야 말이 되는데 임무에 위배하는 행위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문법에 맞지 않는 표현이 들어 있지만 형법 제355조 제2항의 적용을 받아 지난 70여 년간 수많은 사람들이 배임죄로 처벌받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까짓거 를이면 어떻게 에면 어떤가 하며 살아왔다. 문법은 하등 중요치 않았다. 조사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던 것이다. 이제 형법 제355조 제2항이 사라진다니 문제 자체가 사라지지만 왜 이런 문법적 오류가 일어났는가 되짚어 볼 필요는 있다고 생각된다.
우리는 위배하다라는 말을 쓸 때 결코 ~에 위배하다라 쓰지 않는다. 반드시 ~을/를 위배하다라고 말한다. 위배하다가 목적어를 취하는 타동사기 때문이다. 목적어에는 목적격조사 을/를이 와야 한다. 이는 초등, 중학생도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왜 형법 조문에는 ~에 위배하는이 나왔을까. 이유가 있다. 일본 형법을 참조하면서 일본어를 우리말로 잘못 번역했기 때문이다. 해당 일본 형법 조문은 다음과 같다.
일본 형법 배임죄 조문의 '任務に背く行為'를 1953년 형법을 제정한 이들은 임무에 위배하는 행위라 옮겼다. 일본어에는 背く行為라 되어 있다. 違背く行為가 아니다. 왜 일본 형법 조문 그대로 임무에 배하는 행위라 하지 않았을까. 배하는 행위라 하자니 배하다라는 말이 국어에 없다는 걸 당시 법률가들은 알았다. 없는 말을 쓸 수는 없다. 그러니 배하는 대신에 국어에 있는 위배하는을 쓴 것이다. 위를 앞에 붙였다. 그리고 任務に背く行為의 に는 에로 했다. に는 한국어의 에로 번역되는 게 보통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임무에 위배하는 행위라는 잘못된 표현이 생겨나고 말았다. 그리고 지난 70년 이상 그대로 유지되어 왔다.
그럼 1953년에 형법 조문은 어떻게 썼어야 했을까. 일본 형법을 참조하더라도 말은 한국어답게 썼어야 했다. 임무에 위배되는 행위, 임무를 저버리는 행위 등 문법에 맞는 여러 대안이 있었으나 이런 말 대신에 엉뚱하게 임무에 위배하는 행위라는 말 같지 않은 말이 조문 속에 들어갔다. 이제 배임죄 자체가 폐지된다니 문제가 해소되긴 하지만 형법 제355조 제2항에만 오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상법 제622조 제1항은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 법 곳곳에 일본어 흔적이 남아 있다. 그냥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말이 안 되는 한국어로 남아 있다. 하루속히 바로잡아야 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올해로 광복 80년을 맞았다. 왜 말에 이다지도 무관심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