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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설고 난해한 말

법조문의 이해를 가로막고 있는 말들

by 김세중

국가의 가장 기본이 되는 법률인 6법에 사용된 단어가 낯설고 생소해서 조문의 뜻이 무엇인지 알기 어려운 조문이 많다. 문장은 단어들의 연결인데 단어가 이해되지 않으면 문장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읽는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법조문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한 예로 형법 제335조를 보자.


형법

제335조(준강도)

절도가 재물의 탈환에 항거하거나 체포를 면탈하거나 범죄의 흔적을 인멸할 목적으로 폭행 또는 협박한 때에는 제333조 및 제334조의 예에 따른다.


형법에는 강도죄가 있고 준강도죄가 있다. 서로 다르다. 그런데 형법 제335조는 준강도죄를 정의하면서 ‘절도가 재물의 탈환에 항거하거나 체포를 면탈하거나 범죄의 흔적을 인멸할 목적으로 폭행 또는 협박한 때에는’으로 시작한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절도’가 폭행 또는 협박할 수 있나. 사람이 폭행 또는 협박한다. 그런데 ‘절도’가 사람인가. 우리는 ‘절도’라는 말을 행위, 행동이라 알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절도’라는 말을 쓰는 사람은 없다. 절도하는 사람은 절도범이라고 하거나 도둑이라고 한다. 그런데 위 조문에서는 ‘절도’를 사람의 뜻으로 쓰고 있다. 사람들이 아는 ‘절도’라는 의미와 다른 뜻으로 ‘절도’라는 말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읽는 사람이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된다. 법조문을 읽으며 이상한 느낌이 들고 조문의 뜻이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6법의 조문에는 우리가 쓰지 않는 말이 곳곳에 있다. 다음을 보자.


형법

제343조(예비, 음모) 강도할 목적으로 예비 또는 음모한 자는 7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형법 제343조는 강도의 예비, 음모에 관한 죄를 규정하고 있다. 이 조는 ‘강도할 목적으로’로 시작되는데 읽으면서 누구나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강도할’ 때문이다. 우리는 ‘강도’라는 명사에는 너무나 익숙하지만 ‘강도하다’라는 동사는 쓰지 않는다. 일상생활에서는 ‘강도질하다’, 강도짓하다‘ 같은 말을 흔히 쓰고 형법에서는 ‘강취하다’라는 말이 어려운 말이 쓰인다. 즉, ‘강도하다’는 국어에 없는 말이다. 오직 형법 제343조에만 나온다. 법조문이라고 해서 국어에서 쓰지 않는 말을 써도 되나. ‘강도할 목적으로’ 대신 ‘강도의 목적으로’라고 했다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국어에 없는 말인데 법조문에 들어 있는 말은 또 있다.


형법

제98조(간첩) ①적국을 위하여 간첩하거나 적국의 간첩을 방조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7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


형법

제111조(외국에 대한 사전)

① 외국에 대하여 사전한 자는 1년 이상의 유기금고에 처한다.


우리는 ‘간첩’이라는 말에는 너무나 익숙해도 ‘간첩하다’라는 말은 생소하기 그지없다. ‘간첩하다’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그런데 형법 제98조는 간첩죄를 규정하면서 ‘간첩하거나’라고 하고 있다. 형법 제111조에서는 더 어려운 말이 나온다. ‘사전한’이다. 원문은 ‘私戰한’인데 ‘사전(私戰)’이란 말도 좀체 들어보지 못하는 말인데 거기에 ‘하다’까지 넣어 ‘사전한 자는’이라 하고 있다.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다. 이 조항으로 처벌받는 사람이 있는지도 의문이지만 그와 상관없이 ‘사전하다’라는 말은 국어에 없으니 법조문에 있는 ‘사전한 자는’은 읽는 국민을 어리둥절케 할 뿐이다.


형사소송법 제275조에는 ‘좌석한다’라는 말이 있다.


형사소송법

제275조(공판정의 심리)

③검사의 좌석과 피고인 및 변호인의 좌석은 대등하며, 법대의 좌우측에 마주 보고 위치하고, 증인의 좌석은 법대의 정면에 위치한다. 다만, 피고인신문을 하는 때에는 피고인은 증인석에 좌석한다.


법정에서 재판할 때 검사, 피고인 등이 앉는 자리에 대해 규정한 조항에서 ‘피고인은 증인석에 좌석한다’라는 구절이 있다. 피고인신문을 할 때 피고인은 증인석에 앉아야 한다는 것인데 ‘앉는다’고 하면 될 것을 ‘좌석한다’고 했다. ‘좌석한다’라는 말을 쓰는 사람이 있나. ‘좌석하다’는 사람들이 쓰지도 않지만 국어사전에도 없는 말이다.


형사소송법에는 뜻을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단어가 있다. 제120조에 나오는 건정(鍵錠)이 그것이다.


형사소송법

제120조(집행과 필요한 처분) ①압수ㆍ수색영장의 집행에 있어서는 건정을 열거나 개봉 기타 필요한 처분을 할 수 있다.


압수ㆍ수색영장을 집행할 때 ‘건정’을 열 수 있다고 했는데 ‘건정’이 무슨 뜻인지 아는 사람은 아마 별로 없을 것이다. 뜻을 알기 위해 국어사전을 찾아보아도 ‘건정(鍵錠)’이란 말은 국어사전에 없다. 그럼 ‘건정’이란 말의 뜻을 도대체 어떻게 알 수 있나. ‘건정’의 ‘건(鍵)’은 ‘열쇠 건’, ‘자물쇠 건’이고 ‘정(錠)’은 ‘제기 이름 정’이다. ‘건정(鍵錠)’은 잠금장치라는 뜻으로 형사소송법 조문에 쓰였을 텐데 오늘날 ‘건정’이란 말을 아는 사람은 사실상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누구나 알 수 있는 말로 바꾸어야지 마치 암호 같은 말을 법에 그대로 두어서 되겠는가.


‘건정’처럼 도무지 알 수 없는 말은 아니지만 옛날 말투여서 낯설게 느껴지는 말도 있다.


민법

제1060조(유언의 요식성) 유언은 본법의 정한 방식에 의하지 아니하면 효력이 생하지 아니한다.


유언은 아무렇게나 해서는 안 된다. 민법에 정해진 방식으로만 해야 효력이 있다. 굉장히 조건이 엄격하다. 그런데 민법의 그 조문에 ‘효력이 생하지 아니한다’라 되어 있다. ‘효력이 생기지 않는다’라는 뜻으로 해석은 되지만 어색한 느낌을 피할 수 없다. ‘생하지’ 때문이다. ‘생하다’라는 말은 일상생활에서 거의 쓰이지 않는다. 낡은 옛 말투다. ‘생하지’가 아니라 ‘생기지’라고 하면 얼마나 쉽게 이해되는가. 왜 쉬운 말을 두고 낡디낡은 말을 써야 하나. 바로잡아야 마땅하다.


비슷한 예로 ‘해하다’라는 말도 있다. 민법 제38조와 제133조에 있다.


민법

제38조(법인의 설립허가의 취소) 법인이 목적 이외의 사업을 하거나 설립허가의 조건에 위반하거나 기타 공익을 해하는 행위를 한 때에는 주무관청은 그 허가를 취소할 수 있다.


제133조(추인의 효력) 추인은 다른 의사표시가 없는 때에는 계약시에 소급하여 그 효력이 생긴다. 그러나 제삼자의 권리를 해하지 못한다.


‘공익을 해하는’, ‘권리를 해하지’라는 말이 있는데 문맥에 비추어 무슨 뜻인지 짐작은 되지만 잘 쓰지 않는 말이다 보니 어색한 느낌을 준다. ‘공익을 해치는’, ‘권리를 해치지’라고 한다면 훨씬 뜻이 쉽게 와닿을 것이다.

민법에는 ‘해태’, ‘해태하다’라는 말이 아주 많이 쓰인다. ‘해태’는 법률용어다. 어떤 법률행위를 할 기일을 이유 없이 넘겨 책임을 다하지 않는 것이 ‘해태’다. 그런데 명사 ‘해태’도 민법에 나오지만 동사 ‘해태하다’도 나온다. 민법 제65조가 그 예다.


민법

제65조(이사의 임무해태) 이사가 그 임무를 해태한 때에는 그 이사는 법인에 대하여 연대하여 손해배상의 책임이 있다.


명사 ‘해태’로 쓰일 때도 ‘해태’라는 말이 어렵게 느껴지지만 동사로 써서 ‘그 임무를 해태한 때에는’이라고 하니 너무나 낯설게 느껴진다. ‘해태하다’라는 동사는 일상생활에서 전혀 쓰이지 않기 때문이다. ‘해태하다’의 뜻은 ‘게을리하다’이다. 제때에 일을 하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민법의 여러 조문에 들어 있는 ‘해태하다’는 그 조문이 개정된 경우에는 ‘게을리하다’로 표현이 바뀌었다. 그러나 위 제65조처럼 법 제정 이후 한번도 개정된 적이 없는 조문에서는 여전히 ‘해태한’ 그대로다. 그래서 우리나라 민법에서는 ‘해태하다’와 ‘게을리하다’가 뒤섞여 있다. 뜻은 같다. 그렇다면 마땅히 알기 쉬운 ‘게을리하다’로 통일해야 하지 않을까.


‘해태하다’ 못지않게 낯설고 생소한 말이 민법 제233조에 나오는 ‘몽리자(蒙利者)’이다.


민법

제233조(용수권의 승계) 농, 공업의 경영에 이용하는 수로 기타 공작물의 소유자나 몽리자의 특별승계인은 그 용수에 관한 전소유자나 몽리자의 권리의무를 승계한다.


이 조에는 ‘수로 기타 공작물의 소유자나 몽리자’라는 구절이 들어 있다. ‘소유자’는 누구나 무슨 뜻인지 쉽게 알 수 있지만 ‘몽리자’는 아마 누구라도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 ‘몽리자’라는 말은 생활 속에서 쓰이지 않는 말이기 때문이다. 비록 국어사전에는 올라 있지만 생소하기 그지없는 말이다. 이 ‘몽리자’는 이미 1980년대부터 알기 쉬운 말로 바꾸려는 움직임이 꾸준히 있었다. ‘이용자’, ‘수익자’, ‘수혜자’ 등이 대안이었다. 그러나 민법은 끝내 개정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도 ‘몽리자’ 그대로이다.


민법에 낯선 말은 또 있다.


민법

제197조(점유의 태양) ①점유자는 소유의 의사로 선의, 평온 및 공연하게 점유한 것으로 추정한다.


민법 제197조의 제목이 ‘점유의 태양’이다. 원문은 ‘占有의 態樣’이다. ‘태양(態樣)’이 어떤가. 한자로 ‘態樣’이었을 때와 달리 한글로 ‘태양’이라고 되어 있으니 뜻이 잘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누구나 하늘에 떠 있는 ‘태양(太陽)’을 떠올리지 생긴 모습이나 형태를 뜻하는 ‘태양(態樣)’을 생각하기는 쉽지 않다. 제197조 제목의 ‘태양’은 알기 쉬운 말로 바꿀 필요가 있다. 실제로 2015년 제19대 국회에 제출됐던 민법 개정안에는 ‘점유의 태양’이 ‘점유의 모습’으로 바뀌었지만 개정안은 국회를 통과하지 못하고 폐기되고 말았다. 그래서 지금도 민법 제197조의 제목은 ‘점유의 태양’이다. ‘점유의 모습’이라면 한결 국민이 뜻을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태양’도 낯설지만 ‘파훼’라는 말도 무척 어렵게 느껴진다. 민법 제1110조는 다음과 같다.


민법

제1110조(파훼로 인한 유언의 철회) 유언자가 고의로 유언증서 또는 유증의 목적물을 파훼한 때에는 그 파훼한 부분에 관한 유언은 이를 철회한 것으로 본다.


‘파훼’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아마 없을 것이다. 사실 이 말은 거의 100년 전 일제강점기에는 빈번히 쓰였던 말이다. 그러나 광복 이후 급격히 쓰임이 줄었고 지금은 사실상 죽은 말, 즉 사어가 됐다. 누구도 그런 말을 쓰지 않는다. 그런데 민법 조문에만 남아 있다. ‘차등’은 또 어떤가.


형법

제317조(업무상비밀누설) ① 의사, 한의사, 치과의사, 약제사, 약종상, 조산사, 변호사, 변리사, 공인회계사, 공증인, 대서업자나 그 직무상 보조자 또는 차등의 직에 있던 자가 그 직무처리중 지득한 타인의 비밀을 누설한 때에는 3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10년 이하의 자격정지 또는 7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형법 제317조에 나오는 ‘차등(此等)’의 뜻을 아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차등’의 ‘차(此)’는 ‘이’, ‘이것’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차등’의 뜻은 ‘이것들 또는 이들’이다. 알고 보면 참 간단한 뜻인데 지금은 쓰지 않는 대단히 어려운 말이 쓰였다. 1919년 독립선언서에서 ‘우리’라는 뜻으로 ‘오등(吾等)은’이라고 쓴 것과 같다. 오늘날 누가 ‘오등은’이라고 하나. ‘우리는’이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차등의’도 ‘이와 같은’이라고 하면 알기 쉽다. 말은 비록 느리지만 사람들이 잘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차츰차츰 바뀐다. 법조문은 오늘날 쓰는 말로 되어 있어야 마땅하다. 그래야 무슨 뜻인지 알 수 있다.


1950년대에 제정된 민법, 형법, 형사소송법 등은 한자로 적혔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그랬다. 토씨같이 한자로 적을 수 없는 순우리말만 한글로 적혔을 뿐이었다. 법조문을 보면 한자가 한글보다 훨씬 많았다. 법조문은 새카맣게 한자로 뒤덮여 있었다. 한자로 적을 수 없는 토씨같은 것만 한글로 적었으니 그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조금씩 조금씩 한글 전용으로 바뀌어 갔다. 1990년대에는 한글 전용이 본격적으로 정착되기 시작했다. 2000년 이후 들어서는 한글 전용이 확실하게 대세를 이루었다. 특히 2002년에는 6법 중에서 유일하게 민사소송법이 전면적으로 개정되었는데 민사소송법 전 조문이 한자에서 한글로 바뀌었다. 민사소송법이 한글화된 것이다. 그러나 나머지 민법, 형법, 상법, 형사소송법은 한글화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들 법률은 지금도 한자 그대로다. 다만 비록 법률 개정은 되지 않았지만 이들 법률도 한글로 바뀌어 법전에 제공되고 있다. 한자를 아는 사람이 점점 줄어드니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한자로 적혔을 때는 뜻을 파악하는 데 문제가 없었지만 한글로 적어 놓으니 무슨 뜻인지 알기 어려운 예가 생겨났다. ‘단행’, ‘동전’ 등이 그런 예다. 다음 법조문을 보자.


형법

제64조(집행유예의 취소) ①집행유예의 선고를 받은 후 제62조 단행의 사유가 발각된 때에는 집행유예의 선고를 취소한다.


요즘 법전은 기본적으로 한글로 제공된다. 종이 법전은 한글로 인쇄되고, 인터넷 법전의 경우에는 기본이 한글이고 [漢]을 누르면 그제서야 한자로 변환된다. 원문이 제공된다. 그런데 ‘제62조 단행의 사유가 발각된 때에는’에서 ‘단행’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한자로 但行이라 적혔을 때는 但과 行이라는 한자를 통해 의미를 웬만큼 짐작할 수 있지만 말이다.


第제62조(집행유예의 요건) ①3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의 형을 선고할 경우에 제51조의 사항을 참작하여 그 정상에 참작할 만한 사유가 있는 때에는 1년 이상 5년 이하의 기간 형의 집행을 유예할 수 있다. 다만, 금고 이상의 형을 선고한 판결이 확정된 때부터 그 집행을 종료하거나 면제된 후 3년까지의 기간에 범한 죄에 대하여 형을 선고하는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제62조에 ‘다만, ......’ 부분이 단행(但行)이다. ‘但’이 ‘다만 단’이기 때문이다. 즉 ‘단행(但行)’은 ‘다만’으로 시작되는 행을 가리킨다. 한자로 ‘但行’이었을 때는 이런 사정을 짐작할 수 있지만 한글로 ‘단행’이라고 하니 누가 가르쳐 주기 전에는 뜻을 알 수 없다. 그렇다면 법률 개정을 해서 ‘단행’을 ‘단서’와 같은 말로 바꾸어 주어야 읽는 사람이 법조문의 뜻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동전(同前)’이란 말도 비슷한 경우다. '同前'이라 적혀 있을 때는 그나마 뜻을 파악할만하지만 한글로 적혀 있으니 이게 무슨 말인가 싶다. 상법 제5조는 다음과 같다.


상법

제5조(동전-의제상인) ①점포 기타 유사한 설비에 의하여 상인적 방법으로 영업을 하는 자는 상행위를 하지 아니하더라도 상인으로 본다.


제목에 들어 있는 ‘동전’은 ‘同前’이다. 앞의 것과 같다는 뜻이다. 앞이란 제5조의 앞을 말하고 그것은 곧 제4조를 가리킨다. 제4조는 다음과 같다.


상법

第4條(商人-當然商人) 自己名義로 商行爲를 하는 者를 商人이라 한다.


제4조의 제목이 ‘상인-당연상인’인데 제5조의 제목은 ‘상인-의제상인’이란 뜻이다. ‘상인’이라는 점은 같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전’ 대신에 ‘상인’을 되풀이하는 것이 차라리 이해하기 편하겠다. 한자 ‘同前’으로 적혀 있었을 때는 문제가 안 되었지만 한글 ‘동전’으로 바꾸어 놓으니 어색하기만 하다.


세월이 흐르면서 뜻이 달라진 말도 있다. 형사소송법에 나오는 ‘신문지’라는 말이 그렇다.


형사소송법

제440조(무죄판결의 공시) 재심에서 무죄의 선고를 한 때에는 그 판결을 관보와 그 법원소재지의 신문지에 기재하여 공고하여야 한다. (이하 생략)


죄가 없음에도 유죄 선고를 받았던 사람이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는 경우가 간혹 있다. 형사소송법은 이런 경우에 관보와 신문지에 기재해서 공고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조항은 억울하게 유죄 선고를 받았던 사람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기 위한 것이다. 문제는 ‘신문지에 기재하여’다. 아마 누구라도 ‘신문지에 기재하여’라는 표현을 읽고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신문지’는 신문 기사가 실린 종이를 가리키지 신문 자체가 아니다. 판결을 종이에 기재하여 공고한다니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그러나 위 조문의 ‘신문지’는 종이를 가리키는 게 아니다. 신문 자체를 가리킨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신문지는 신문 기사가 인쇄된 종이를 가리키지 않았다. 신문지는 곧 신문과 같은 뜻으로도 쓰였다. 따라서 그 시절에는 ‘신문지에 기재하여’가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차츰 신문지와 신문의 의미가 달라졌다. 신문지는 신문 기사가 인쇄된 종이를 가리키게 되었다. 지금 국어사전에도 ‘신문지’는 ‘신문 기사를 실은 종이’라고 되어 있다. 단어의 의미가 바뀐 것이다. 그래서 요즘 ‘신문지’는 “이사할 때 깨지기 쉬운 유리컵은 신문지로 싸서 옮겼다.”, “채소를 신문지에 싸서 냉장고에 넣었다.” 등과 같이 쓰는 게 보통이다. 그리고 “(칼럼니스트가) 신문에 글을 썼다.”라고 하지 “신문지에 글을 썼다.”라고 하지 않는다. 요컨대 형사소송법 제440조의 ‘신문지’는 ‘신문’으로 바꾸어야 비로소 조문의 뜻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신문지에 기재하여 공고하여야’가 아니라 ‘신문에 기재하여 공고하여야’라야 한다.


민법에는 ‘이의를 보류한 때에는’이라는 말이 나온다. 민법 제145조다.


민법

제145조(법정추인) 취소할 수 있는 법률행위에 관하여 전조의 규정에 의하여 추인할 수 있는 후에 다음 각호의 사유가 있으면 추인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이의를 보류한 때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일반인이 제145조의 내용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법정추인’, ‘법률행위’, ‘추인’ 같은 말에 들어 있는 깊은 뜻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법조인들마저 잘 이해하지 못하는 표현이 들어 있다. ‘이의를 보류한’이란 말이 그것이다. ‘이의’는 누구나 아는 말이다. 다른 생각이다. “이의 있습니다!” 하고 손을 번쩍 들고 말하면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는 의사 표시다. 그럼 ‘이의를 보류한’은 무슨 뜻일까? 다른 생각을 밝혔다는 건가? 그게 아니고 다른 생각을 밝히기를 미루었다는 건가? 둘은 서로 정반대의 뜻이다. 그리고 보통 ‘보류하다’는 미룬다는 뜻이니 ‘이의를 보류한’은 ‘이의를 미룬’을 뜻한다. 그러나 이 법조문의 취지는 ‘이의를 미룬’이 아니다. ‘이의를 밝힌’이다. ‘보류한’이란 말을 잘못 썼다. 왜 이런 일이 빚어졌을까? 일본 민법을 번역하면서 해당 조문의 ‘異議をとどめたときは’의 ‘とどめる’를 ‘보류한’으로 잘못 번역했기 때문이다. 일본어 ‘とどめる’는 한자로는 ‘留める’이고 우리말로는 ‘남기다’, ‘남겨놓다’이기 때문에 ‘남긴’으로 옮겨야 정확한 번역인데 엉뚱하게 ‘보류(保留)한’으로 잘못 번역하고 말았다. 그 결과 ‘이의를 보류한 때에는’과 같은 아리송한 표현이 민법에 자리잡았고 지금도 그대로다. 시급히 바로잡아야 한다.


민법 제590조에도 ‘보류하다’가 잘못 쓰이고 있다. 민법 제590조는 다음과 같다.


민법

제590조(환매의 의의) ①매도인이 매매계약과 동시에 환매할 권리를 보류한 때에는 그 영수한 대금 및 매수인이 부담한 매매비용을 반환하고 그 목적물을 환매할 수 있다.


물건을 팔면서 나중에 다시 되사들이는 조건으로 파는 경우가 있다. 환매는 자기가 판 물건을 되사들이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를 규정한 제590조에 ‘환매할 권리를 보류한 때에는’이라고 되어 있다. ‘보류하다’는 미룬다는 뜻이다. 그러나 제590조의 뜻은 ‘환매할 권리를 미룬 때에는’이 아니다. ‘환매할 권리를 가진 때에는’이거나 ‘환매할 권리를 확보한 때에는’에 가깝다. 따라서 여기서도 ‘보류한’은 적절한 단어가 아니다. 다른 말로 바꾸어야 한다. 그래야 오해를 막을 수 있고 뜻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상법 제402조에는 ‘유지하다’라는 동사가 쓰이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상법

제402조(유지청구권) 이사가 법령 또는 정관에 위반한 행위를 하여 이로 인하여 회사에 회복할 수 없는 손해가 생길 염려가 있는 경우에는 감사 또는 발행주식의 총수의 100분의 1 이상에 해당하는 주식을 가진 주주는 회사를 위하여 이사에 대하여 그 행위를 유지할 것을 청구할 수 있다.


요즘 법전은 기본적으로 한글로 제공된다. 법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한글로 된 조문을 읽는다. 그래서 상법 원문에 있는 ‘그 行爲를 留止할 것을’은 ‘그 행위를 유지할 것을’이라 돼 있다. 그런데 ‘행위를 유지할’에서 누구나 의문을 느낄 것이다. 문맥과 잘 맞지 않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유지하다’는 보통 계속한다는 뜻인데 여기서는 중지한다는 뜻이다. 이 조문의 ‘유지’는 계속한다는 ‘유지(維持)’가 아니라 중지한다는 ‘유지(留止)’다. 그리고 ‘유지(留止)’는 일상생활에서 전혀 쓰이는 말이 아니다. 국어사전에도 물론 없다. 그래서 법조문을 이해하기가 무척 어렵다.


민법, 형법, 상법, 형사소송법 등에 들어 있는 낯설고 난해한 말들은 법조문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게 가로막고 있다. 법조문은 법조인만 보라고 만든 것이 아니다. 국민이 보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오늘날 쓰이지 않는 말, 국어사전에도 없는 말, 정체불명의 말들은 알기 쉬운 말로 바꾸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국민이 법을 알고 법을 지킬 수 있다. 법에 대한 믿음도 높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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