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으로 가는 우버에 타고 5분 정도 지났을 때였다.
"내 백팩 실었니?"
다급하게 아이에게 물었지만 나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차가 작아서 짐을 다 실을 수 있네 없네 하다가 집에 아직 작은 백팩 하나가 있다는 사실을 잊고 트렁크를 닫았다... 는 것을.
노이즈 캔슬링 이어버드, 무선키보드, 태블릿, 목베개, 담요, USB 케이블에 보조배터리, 충전기... 기내에서 제공하는 영화를 내 이어버드로 들으려고 산 블루투스 송신기까지, 다섯 시간의 비행을 편하게 해 줄 모든 것이 거기 들어있었다. 우버 기사는 되돌아가겠냐고 물었다. 나는 비행기를 놓치게 될 거라고 대답했다. 그는 몇 시 비행이냐고 물었다.
"8시 25분"
그는 말이 없어졌다. 이미 7시였다.
남들은 '에어 개나타'라고 비웃는 에어캐나다를 캐나다에 사는 나는 마일리지를 적립하는 신용까지 만들어서 이용중이다. 국내선이 다섯 시간. 여권이 없어도 되는 국내선이고 지갑 정도는 가져왔다는 것에 안도했다. 하여간 비행기를 놓칠 수는 없다. 국내선인데 다섯 시간이라니. 여름에 몬트리올에서 밴쿠버로 가는 비행기표는 꽤 비쌌다. 더구나 공항에서 구입하는 표는 얼마가 될지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게 도착한 공항에서 짐을 부치고 시큐리티 체크를 하러 가는데 이럴 수가... 몇 겹으로 둘러싸인 길고 긴 대기줄. 몬트리올 공항을 이용하면서 이렇게 비행기 타려는 사람이 많은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러고 보니 극성수기인 7월 말의 아침, 사람이 많은 게 당연했다. 더구나 퀘벡주는 이 때에 construction holiday라는 게 있어서 건설쪽 일을 하는 사람들은 물론, 꽤 많은 직장인이 휴가를 간다. 그러면 에어캐나다는 왜 7시까지 공항에 오라고 안내메시지를 보냈을까? 줄은 천천히 움직일 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앞에 있는데, 출발 30분 전이 되자 보딩을 시작한다는 문자가 날아왔다.
직원에게 보딩패스를 보여주고 비행기를 놓치게 생겼다고 사정했다. 그러자 십 미터쯤 앞에 걸어가는 한 여성을 가리키며 따라가라고 한다. 아직 줄을 서고 있는 아이의 이름을 다급하게 불렀다. 아이는 인파를 헤치고 나왔다. 창피하니까 그렇게 좀 부르지 말라고 화를 낸다. 그래도 비행기를 놓치게 생겼는데 창피한 게 대수냐, 버건디 색의 바지 정장을 입은 중년의 흑인여성 뒤를 따라 뛰어갔다. 그녀는 우리를 달고 VIP 게이트로 들어갔다. 뒤에서 봤을 땐 공항 직원인 줄 알았는데 보딩 패스와 작은 핸드백을 들고 있었다. 그녀의 기운을 받아 느긋한 척 겨우 숨을 돌려 컨베이어 벨트에 짐을 내려놓는 순간! 우리 티켓이 프리미엄 이코노미 좌석이라는 사실이 생각났다.
늘 이코노미만 타봐서 알 도리가 있나. 시큐리티 체크하는데 10분 정도 걸린다며 비행시간 한 시간 반 전에 오라고 한 이유는 국내선이어서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원래 VIP 게이트로 들어갈 수 있는 거였구나. 비즈니스도 퍼스트 클래스도 아닌 '프리미엄'이 주는 한 끗 차이가 이런 것이었던가. 이코노미였다면 출장 준비로 늦게 잠자리에 든 아이를 새벽에 깨워 나왔어야 했었다. 딸아이는 나무 숟가락 대신 스테인리스로 된 식기가 나오는 기내식이 인상적이었던 모양이지만, 나는 그 한 시간의 차이가 주는 특권에 멍해지는 느낌이었다.
"돈 많은 사람들은 비행기에서도 일을 하는구나"
다른 사람들이 노트북 컴퓨터를 사용하고 있는 걸 보고 한 아이의 말이었다. 나는 집에 두고 온 200달러짜리 이어버드 대신 프리미엄 이코노미석이라서 받은 3달러짜리 허접한 이어폰을 꽂아 기내 영화를 찾고 있는 중이었다.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프리미엄 이코노미를 타게 해 주겠단다. 마일리지를 조금 더 써서 참교육의 현장을 보여준 것 같은, 약간의 보람마저 느꼈다. 나는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오로지 유리잔에 담아 받는 프리미엄 이코노미의 특권을 즐기려 레드와인을 한 잔 주문했다. 아침부터.
하여간 그건 꽤나 인상적인 비행이었다. 세 시간쯤 날아 슬슬 지겨워질 때쯤 창가에 앉은 딸아이가 탄성을 질렀다. 록키 산맥이었다.
"엄마가 그럴 줄 알고 오른쪽 창가로 예약했지"
한여름인데 높은 산이 끝없이 펼쳐졌다. 이름에만 산(mont)이 들어있지 제대로 된 산은 볼 수 없는 몬트리올에서 나고 자란 아이에겐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아직 눈이 남아있는 거대한 산이 굽이굽이 아침햇살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한참을 날아도 계속되는 그 모습에 나도 반해서 자꾸만 내다보았다. 프리미엄 이코노미를 타면서 신기한 일이 하나 더 있었는데, 물론 기종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건 화장실에 창문이 있다는 것이었다. 설산을 내려다보며 손을 씻는 화장실이라. 캐나다에 23년 살면서 결국 못 가본 록키산맥을 이렇게 맞이했다.
사실 에어캐나다가 '에어개나타'라는 오명을 얻게 된 데에는 잦은 지연이 한몫을 했다. 2025년에는 획기적으로 좋아졌다고 하지만, 2024년에는 무려 캐나다 국적기임에도 불구하고 항공업계 최하위 20% 안에 드는 한심한 숫자를 보여줬더랬다. 캐나다에 사는 우리로서는 거기에 별의별 사건사고를 뉴스로 듣게 되는데, 최근에 가장 웃기는 사건은 원주민 대표의 모자(왕관?).. 왜 그 깃털로 커다랗게 만든 상징을 기내에 수납공간이 부족하다며 화물칸으로 보내려고 했던 일이다. 한 부족의 족장도 아니고 캐나다 전체의 원주민을 대표하는 의장의 신성한 모자를 쓰레기봉투에 담아 치우려고 했던 일이 공분을 일으켜 야단이 났었다. 뒤늦게 사과를 한다며 15% 항공권 할인쿠폰을 보냈다던가.
그러고 보니 에어캐나다 사장도 황당한 발언을 한 적이 있었는데, 이중언어를 쓰는 캐나다의 국적기의 대표라는 사람이 바빠서 불어는 배우질 못했다며 알 바 아니라는 태도를 보였었다. 이게 왜 문제냐고? 에어캐나다의 본사는 퀘벡주 몬트리올에 있다는 사실! 이곳에 14 년을 거주했고, 한때는 국영기업이었던 에어캐나다를 맡아 운영하는 사람이 할 말은 아니라서 캐나다, 특히 불어권 사람들에게 엄청난 욕을 먹었다. 그런데 그의 이름은 '마이클 루소'로, 루소라는 성은 전형적인 프랑스 이름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장자크 루소의 그 '루소(Rousseau)'다. 붉은 머리를 가진 사람이라는 뜻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프랑스 혈통의 그가 에어캐나다의 CEO직의 공적인 자리에서 '불어를 몰라도 몬트리올에서 사는데 전혀 지장 없다' 따위의 말을 했으니 프랑스계 국민들에게 배신감을 가져다줬고 정치경제계가 들썩거렸다.
그런 에어캐나다가, 내게는 나름 소중한 국적기가 밴쿠버에는 오히려 착륙예정 시간보다 약간 이르게 내려주었다. 승무원은 비행 내내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북미 국내선의 승무원 답지 않게 상냥하고 친절했다. 그렇게 호감도를 살짝 올려준 에어캐나다가 몬트리올로 돌아오는 길에는 러기지 하나를 내어주지 않았다. 한 시간 가까이 기다리다가 찾아간 창구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아직 밴쿠버에 있다고 했다.
"왜요?"
"잊어버렸나 보죠."
올 때는 프리미엄 이코노미가 아니라서 그랬을까? 덕분에 공항에서 바로 출근해야 하는 길이 늦어졌다. 그럼 그렇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