톱을 샀다. 집엔 아주 가늘고 작은 줄톱밖에 없어서 늘 아쉽던 중이었다. 레노데포의 톱 코너에는 수십 가지의 톱이 걸려 있었다. 하나씩 쥐어보고 망설이는데 직원이 지나다가 보고는 도움이 필요하냐고 물었다. 혼자 크기만 보고 선택했더라면 드라이월밖에 못 자르는 톱을 살 뻔했다. 새로 산 톱으로 앞마당에 거슬리던 작은 나무 한 그루를 베어냈다.
사실 나는 늘 건축자재를 파는 레노데포 Réno Dépôt를 좋아했다. 전쟁을 겪은 우리 어머니는 먹을 것이 가득 쌓인 코스트를 좋아하셨는데, 나는 집 한 채를 지을 수도 있을 것 같이 모든 것을 갖춘 레노데포 매장에 들어서면 의욕이 생겼다. 월마트나 코스트코는 계산대에 가기까지 일하는 사람 하나 보기가 힘들어도 레노데포에서는 페인트 코너나 쌓아놓은 목재 옆에서 쉽게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그 분위기가 좋아서 이력서를 내볼까 진지하게 생각하던 때도 있었다. 선반 가득한 상품들 중에서 내 작업에 필요한 물건을 골라주던 직원이 입고 있는 조끼는 뒤에 이렇게 쓰여있었다.
"멍청한 질문이란 건 없습니다. Il n'y a aucune question niaseuse"
이혼 이후 가장 먼저 장만한 것은 병따개였다. 파스타소스 병뚜껑을 열 수가 없었다. 여자 혼자 딸 둘을 키우면서, 캐나다에서 오래된 단독주택까지 관리하려면 집에 남자가 필요할 때가 왜 없을까. 그런데 새로 산 병따개 하나에 자신감마저 생겼다. 쓸만한 공구는 전남편이 다 가져가버려서 필요할 때마다 하나씩 장만하기 시작했다.
전동드릴이 필요했다. 벽에 못 박는 일부터 새로 배워야 했다. 이곳에서 주로 사용하는 벽의 자재는 드라이월이라고 부르는 석고보드인데 콘크리트나 나무보다 당연히 못은 수월하게 들어갔다. 스크루로 먼저 작은 구멍을 뚫고 나사못을 전동 드릴로 돌려 박았다. 힘을 받아야 하는 곳엔 굵은 스크루로 구멍을 낸 뒤 플라스틱 앵커를 끼고 거기에 못을 박았다. 의외로 전동드릴이 필요한 일은 자주 생겼다.
이번엔 못 박았던 자리를 메울 플래스터가 필요했다. 몇 날 며칠을 걸려 지하 화장실의 벽을 플래스터라고 부르는 회반죽 한 통을 사다가 메꾸고 마르기를 기다려 사포질을 했다. 바닥은 타일을 시공하는 대신 이어 붙이기만 하면 되는 나무바닥재를 이케아에서 사 왔다. 연두색으로 벽을 칠하고 벤치와 거울까지 사다 걸어놓으니 무서워서 안 들어가겠다던 딸아이를 설득할 정도는 되었다.
쉬운 일은 없었다. 전구가 나가면 안 깨지게 잘 싸들고 나가서 같은 모양을 찾았다. 전등 위치에 따라 밝기나 색감을 생각해 가면서. 페인트칠은 오래된 칠을 벗겨내고 튀지 않게 신문지를 깔고 프라이머를 바르는 밑작업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간단한 일이라도 처음 하는 일은 몰라서 어려운 일이니까 작은 일 하나에도 유튜브를 찾아보고 또 봤다. 엄마이자 아빠가 된 나는 집수리며 청소가 가장 바쁜 5월에 찾아오는 어머니날이 일년 중 가장 싫었다. 그래도 결과가 눈에 금방 보이는 일이니까 하나씩 해결할 때마다 스스로 대견했다.
그런데, 그렇게 좋아하던 레노데포가 사라졌다. 몇 년 전에 로나 Rona 그룹 산하로 들어간 건 알고 있었지만 지난주에 가보니 아예 로나플러스라는 샛노란 간판으로 바뀌어 있었다. 매장엔 물건도 그대로, 핼로윈 장식도 여전했지만 레노데포라는 이름은 이제 없다. 내 추억의 한 페이지가 또 하나 접혔다.
몇 년 동안 모인 전구와 굳어져 못 쓰게 된 페인트 몇 통을 가지고 에코센터로 향했다. 폐자재라든가 일반 쓰레기와 같이 버리면 위험한 것들을 받아주는 곳인데 지역별로 거주민인 걸 확인하고서야 들어갈 수 있다. 전에 가 본 기억이 있어서 이번엔 알아서 운전면허증부터 건넸다. 에코센터 입구에 근무하는 직원은 젊은 흑인남자였다. 면허증에 있는 주소로 뭐가 나왔는지 OOO하고 관련이 있느냐고 물었다. 발음은 이상했지만 전남편의 이름이 틀림없었다.
"Non"
순간적으로 부정해 버리고는 곧이어 덧붙였다.
"Non plus. (No more)"
에코센터 직원은 입가에 웃음이 어리는 걸 얼버무리려는 듯 책상을 내려다보면서 바쁜 척을 했다.
이혼을 농담처럼 처음 보는 사람에게 툭 던지는 날이 올 거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세상에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영원히 남아있는 건 없다. 인생은 그래서 재미있다. 아주 가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