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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지혜 Oct 20. 2024

캐나다 5달러 지폐의 아이들

    얼마 전 갔던 앳워터 시장에서 치즈를 사고 거스름돈으로 종이돈 $5 지폐를 받았다. 캐나다에서 플라스틱 돈으로 바꾼 게 십 년도 더 전의 일이니까 하키 소년의 그림이 있는 이 돈이 내 지갑으로 들어오는 건 아주 오랜만이다. 2002년에서 2013년까지 발행된 이 지폐는 내 이민생활의 첫 절반을 함께 한 셈이다. 지금은 앞에 캐나다 총리를 지냈던 윌프리드 로리에 Wilfrid Laurier 경의 사진이 1972년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들어가 있고, 뒷면에는 2013년에 시작된 개척자 Frontier 시리즈인 우주를 유영하는 우주인의 사진으로 대체되었다. 하키를 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퀘벡의 유명한 소설 하키 스웨터 Le Chandail de Hokey에서 나왔다. 지폐에는 소설의 앞부분이 이렇게 적혀있다.


Les hivers de mon enfance étaient des saisons longues, longues. Nous vivions en trois lieux: l'école, l'église et la patinoire; mais la vraie vie était sur la patinoire.


어릴 적 겨울은 길고 긴 계절이었다. 우리는 학교와 교회, 그리고 스케이트 링크에서 늘 지냈는데, 진짜 인생은 스케이트 링크에서 펼쳐졌다.


    그림을 들여다보면, 잘 보이지는 않지만, 다른 아이들은 빨간 옷을 입고 있는데 앞의 한 명만 흰 옷이다. 9번 등번호가 보이는 건 한 명인데, 알고 보면 빨간색 까나디엥 유니폼을 입고 있는 모든 아이들이 9번을 달고 있다. 전설적인 퀘벡의 하키 선수 모리스 리샤 Maurice Richard의 등번호였다. 


    다른 퀘벡의 아이들처럼 소년은 마을의 들판을 얼려 만든 스케이트 링크에서 겨울을 보냈다.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토론토에 있는 이튼 센터에 정성스럽게 편지를 써서 하키 스웨터를 주문했다. 그런데 막상 받은 소포에는 몬트리올 까나디엥 팀 대신 토론토 메이플 리프 Maple Leafs의 유니폼이 들어있었다. 내 팀, 네 팀 할 것 없이 모든 친구들이 빨간 하키 스웨터를 입고 있는 가운데 소년 혼자 라이벌 팀의 스웨터를 받아 들고 절망했다. 아이는 기도를 시작했다. 하느님이 새 스웨터에 좀벌레를 내려주시기를. 그래서 어서 카나디엥 팀의 스웨터를 살 수 있게 되기를.


    저자인 로슈 카리에 Roch Carrier는 지금도 인구가 2천 명이 안 되는 퀘벡의 작은 마을 생 쥐스틴 St-Justine에서 자랐다. '하키 스웨터'는 1946년 그의 어린 시절 실제로 있었던 일을 그렸다. 이 짧은 단편소설은 카나디엥으로 대표되는 프랑스어 사용자 퀘벡과 그 외 영어지역과의 갈등을 선명하게 보여주면서 유명해졌다. 뿐만 아니라 가톨릭이 지배했던 당시 퀘벡 사회를, 그리고 여성이고 어른인 엄마와 어린 아들의 가치관의 차이를 그리면서 그때의 시골마을 풍경이 생생하게 살아났다. 

    

    캐나다에서, 특히 퀘벡주에서 하키라는 건 생활이다. 10월부터 다음 해 3월까지 무료로 문을 여는 실내 아이스링크가 2014년 통계로 243개라고 한다. 동네 공원에서 울타리를 치고 물을 부어 만드는 실외 링크도 곳곳에 있다. 남자아이들은 걸음마를 배우듯 하키 스틱을 잡고 그중에 아주 일부만이 프로의 세계로 들어간다. 정도 같이 일했던 동료 하나는 17살짜리 아들을 미국으로 유학 보냈다. 하키의 본고장 퀘벡에서 태어난 아이가 텍사스로 하키 유학을 간다는 이상하게 들리긴 했지만, 자본의 시대니까 하키도 별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DJ는 날이 추워지자 올해도 아들의 하키경기를 따라다니기에 바빴다. 


    "선수로 키울 거야?"


     14살이 된 아들이 지난 경기에 몇 골을 넣었는지 신이 나서 설명하던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사막의 모래 한 줌 같은 재능까지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래도 주말에 가끔은 아이 엄마가 데리고 다니면 안 되겠냐는 내 제안은 늘 거절했었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3년을 만나면서도 연인 사이로 발전이 안 됐던 이유에 하키도 한몫을 했었던 것 같다.


 몬트리올의 겨울은 10월에 시작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밤새 샛노랗게 변한 뒷집의 나무를 바라보며 느긋하게 차를 한 잔 마셨다. 

 비록 다음 주말엔 무수히 쌓인 낙엽을 청소해야 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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