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손지혜 Apr 30. 2024

국가가 전사자를 기억하는 방법

캐나다 수도 이야기 3

몬트리올 총영사관에서 일하던 시절, 한국전쟁 참전용사 분들을 모시고 제법 큰 리셉션을 연 적이 있었다. 올드 봉스쿠르 마켓의 메인 홀을 빌려 테이블마다 꽃을 장식하고 한국 음식을 준비했다. 아래층에 웅성이는 소리가 나서 내려다보니 몬트리올 시장 제랄드 트랑블레가 건물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고, 그 주위로 마치 자석에 끌리는 쇳가루처럼 수십 명의 남자들이 그의 흐름을 따라가고 있었다. 이제 80대 이상이 된 베테랑들은 모처럼 정복에 베레모를 갖춰 입고, 가슴에는 계급장과 훈장을 달았다. 지구 반대편, 먼 나라에까지 달려와 목숨 걸고 싸워준 분들이었다. 나는 존경과 감사함을 담아 정중히 그분들을 맞았다. 모든 게 완벽했다. 그중 한 사람이 다가와 말을 걸었을 때까지.

"Mon frère est mort en Corée."

갑자기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작고 마른 체구는 약간 구부정했지만 표정은 단호했다. 사라질 듯이 옅어져 버린 그의 회색 눈동자가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당황했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Mon frère est mort en Corée." 여전히 얼어붙은 나를 두고 실망한 모습으로 돌아섰다. 


그의 형제가 죽었다. 한국 땅에서... 명복을 빌어드렸어야 했을까? 감사하다고 했어야 했을까? 아직도 잘 모르겠다. 지금이라면 그저 한 번 안아드렸을지도 모르겠다. 아직 20대, 아니 어쩌면 십 대였을지도 모를 그의 젊음이 머나먼 한국땅에서 형제를 잃었다. 이름도 모르는 그 한 사람의 죽음이 내 마음에 쿵 내려앉았다. 나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얼굴로 행사 내내 부끄러움에 몸을 낮췄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국가는, 우리는, 어떻게 그들을 기억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찾아 새로운 곳을 여행할 때마다 국립묘지나 전쟁기념관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

팔러먼트 힐의 전쟁기념탐

오타와 팔러먼트 힐의 전쟁기념탑에는 1차 세계대전이 있었던 1914년에서 1918년이 맨 앞에 적혀 있고, 그 옆을 빙 둘러 캐나다가 참전했던 전쟁의 역사가 있다. 옆 면의 1950-1953년이 한국전쟁이다. 캐나다는 1950년 7월 30일 세 척의 구축함을 시작으로 1953년 휴전이 될 때까지 육군과 공군을 포함, 모두 26,791명의 군인을 보냈는데 그 숫자는 미국과 영국 다음으로 많으며 인구 대비로는 가장 많은 숫자였다. 기념탑 앞에는 어느 이름 모를 병사의 무덤이 놓여 있다. 


나는 캐나다가 이 희생을 어떻게 기록하는지 보고 싶어져서 전쟁기념관으로 향했다.

전쟁기념탑을 만들기 위해 제작된 모형

오타와 전쟁기념관은 팔러먼트 힐 서쪽, 차로 약 10분 거리에 있다. 전시규모가 커서 시내에서 떨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캐나다가 겪어온 전쟁을 순차적으로 연결해 놓은 통로를 따라갔다. 

1812년도의 전장에서 사용되었던 의료기구
히틀러가 탔던 자동차

제2차 세계대전에서 윈스턴 처칠이 언급한 독일의 잠수함 U 보트에 관한 내용이 있는데, 물론 U보트는 이곳에는 없다. 10년 전에 시카고에서 한 번 본 적이 있는데, 그때에도 내부는 미리 예약을 해야 들어갈 수 있었다. 

U 보트의 위협이 가장 두렵다고 한 처칠 수상
시카고 산업기술 박물관에서 찍은 U 보트의 모습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한국전쟁에 관련된 전시물이 간단하게나마 있었다.

한국전쟁 전시물, 수송기였던 Thunderbird 모형이 걸려있다

오타와의 전쟁기념관에는 독특한 공간이 있는데, 전쟁 중의 참호를 재현해 놓은 곳이다. 구불구불 어두운 통로를 따라가다 보면 보초를 서는 병사, 쉬고 있는 병사의 모습이 보이면서  전장의 긴장이 느껴진다.

어두운 미로 안에 병사들이 생활하는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야간모드로 설정해서 촬영한 사진

옆에는 작게 만든 모형도 있어 전체 구조를 조감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참호의 미니어처 버전

전쟁의 참상을 느끼게 하는 구조물은 또 있다. 모퉁이를 돌자 잔혹하기로 악명 높은 파스샹달 전투(Battle of Passchendaele)의 한 장면이 나타났다. 나무판자 위를 걷다가 몸이 거의 진흙에 잠긴 병사의 모습을 안타깝게 보고 있는데 열 살쯤 되는 남자아이 하나가 병사의 머리를 밟고 뛰어갔다. 뒤이어 나타난 아이의 부모를 붙잡고 한소리 하려다가 참았다. 아무리 실제 사람이 아니라 모형이라지만 그럴 수는 없는 일인데...

진창 속에 파묻혀 버려진 전사자의 모습

독일에 대항하여 영국군의 장교 더글라스 헤이그 (Douglas Haig) 백작은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는 벨기에의 이프르 동쪽, 파스샹달 능선을 확보해야 해야 한다고 믿었다. 쏟아지는 비와 포탄 속에서 역사상 최악의 교전 중 하나로 기록된 이 전투는 이십만 명의 영국 및 연합군의 희생을 치르고서야 승리를 맞이할 수 있었다.  만 명을 훌쩍 넘는 군인들의 시체가 진흙 속에 묻혀버렸고, 1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에 프랑스와 영국을 포함한 연합군, 그리고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동맹군이 대치하던 폭 300미터의 이 지역은 No man's land라고 불렸다. 이 전쟁을 기록한 영화가 바로 샘 멘데스 감독의 2019년 작 '1917'이다.


박물관의 가장 큰 공간인 탱크 전시관에 가려면 긴 터널 같은 공간을 지나야 한다. 빨려들 듯이 아래로 내려가보면 수십대의 은퇴한 탱크와 중화기가 도열하고 있다. 

그중에 M109A4+는 내부를 볼 수 있도록 해놓았다. 비교적 안의 공간이 넓은 편이어서 네 명이 들어가 작업할 수 있다고 한다. 영화 '퓨리(Fury)'에 나오는 셔먼 전차가 다섯 명을 수용했던 걸 생각하면 그보다는 작을 것 같다.

M109는 캐나다에서 1968년부터 2005년까지 사용되었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전시장을 둘러보고 나오는 길목에 조각상을 만들기 위해 제작한 모형 하나가 눈에 띄었다. 눈물이다. 수없이 많은 희생, 기다리는 아내, 어머니... 이 안의 많은 전시물이 결국... 이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나. 전쟁은 비극이다. 


작가의 이전글 캐나다 정치의 꽃, 국회의사당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