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그 애가 부러웠다.
돌아보면 난 유년시절부터 큰 욕심이 없었던 아이였던 것 같다. 무언가가 가지고 싶어 부모님을 조르던 일도, 딱히 누군가를 부러워한 일도 없었으니 말이다. 항상 지금의 삶도 그럭저럭 살만 했고, 무언가 필요한 게 있으면 돈을 모으거나 직접 벌어 사면 됐다. 또한, 누군가를 부러워한다 해서 딱히 바뀌는 것은 없으니 그냥저냥 현재의 삶에 만족하고 살았던 것 같다. 그런 내 서사에 누군가를 진심으로 부러워해본 적이 딱 한번 있다.
때는 내가 학원에서 고등부 수학강사로 일할 때의 일이다. 그 애는 내가 전담해서 가르치는 학생이었고, 공부에는 영 흥미가 없는 아이였다. 항상 선생님들끼리의 회식날이면 어김없이 튀어나와 모든 선생님들의 걱정을 한 몸에 샀던 아이였지만, 난 그 애를 부러워했다. 내색은 안 했지만 훗날 그 아이가 가장 행복하게 살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 애는 나와는 대척점에 서있는 사람이었다. 항상 과거를 되짚어보고 현재에 최선을 다하면서도 미래를 걱정하는 그런 복잡한 삶이 아닌, 오직 현재에 집중하고 즐기는 사람이었다. 내가 모르는 나름의 고충과 걱정이 분명 있을 테지만, 확실한 건 내 서사에서 그 아이만큼 자주 웃는 사람은 본 기억이 없다. 모든 것에 일단은 회의적이고,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나와 달리 대부분이 긍정이고, 수용인 아이였다.
그 애의 일상은 항상 웃음으로 가득했다. 난 자주 그 애에게 물었다. 어떻게 그렇게 매일매일이 즐거울 수 있냐고..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마음으로 별생각 없이 살면 된다는 그 애의 멋쩍은 대답에 나도 멋쩍게 웃었다. 그리곤 그 애의 말이 이따금 맴돌았다. 아마도 그 말에 난 형용할 수 없는 본질적인 괴리를 느꼈던 것 같다. 나의 영혼은 그 애와 너무나 큰 괴리를 가지고 있었고, 염색된 물이 다시 순수한 물이 될 수 없듯, 나 역시 남은 생엔 저런 순수한 영혼을 가질 수 없겠구나 라는 생각에 괜스레 마음 한편이 헛헛해짐과 동시에 부끄럽지만 내심 그 애가 부러웠다.
언젠가 당신은 내게 공부를 왜 해야 되느냐 물었고, 나는 나중에 그럴듯한 직장과 삶을 위해서라고 답했다. 또다시 당신은 왜 그럴듯한 직장과 삶을 살아야 하느냐 물었고, 나는 남들보다 더 나은 삶과 행복한 삶을 위해서라고 답했다. 이에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는다는 말처럼 행복도, 자주 행복한 사람이 먼 훗날 가서도 자주 행복하지 않겠느냐는 그 애의 말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말이 마치 지금 일상에서 행복을 찾지 못한 사람은 시간이 지나도 행복을 찾지 못하지 않겠느냐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내가 현재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해 훗날 그럴듯한 직장과 많은 연봉을 받는 사람이 된다면, 그 시기의 그 애보다 자주 웃으며 살 수 있을까. 아무리 돈을 잘 벌고 사회에서 정의하는 성공한 삶을 살더라도 그 나름의 걱정과 고민이 있을터. 우리네 인생에 걱정과 고민이 항상 따라다니는 존재라면, 지금 현재 자주 웃을 수 있는 사람이 나중에도 자주 웃을 수 있고, 지금 자주 행복한 사람이 나중에도 자주 행복할 수 있는 것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그 애가 정의하는 행복은 나의 정의와는 사뭇 달랐던 것 같다. 딱히 선명하게 정의 내리며 산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그저 부정적인 감정과 불행한 일들에 얽매이지 않은 일상이면 그것이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어느 순간부터 일상에 더 이상 새로울 것도 대단한 일도 딱히 없었기에, 침착하게 판단하여 부정적인 것들로부터 벗어나는 길이 행복이라고 단정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와 관련해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그리고 더 나은 선택을 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왔다. 과거를 복기하고, 미래의 경우의 수를 추측하며 어떻게 하면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었나 고민하며 살아왔다. 그렇게 살다 보니 나의 사고와 영혼의 결 자체가 세속적이게 되었지만, 많은 불행한 일들로부터 멀어질 수 있었기에 그것에 난 스스로 만족했다.
그런 내 일상에 당신을 만나고, 나의 행복에 대한 철학에 회의를 느꼈다. 누가 봐도 저 아이가 나보다 더 행복해 보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난 저렇게 자주 웃을 수 없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행복이란 무엇인가. 그 아이를 가르치는 시간일 때면 나는 자주 스스로에게 그 질문을 던졌고, 그 아이와 함께하며 자연스레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자주 웃을 수 있는 삶. 일상의 사소함에 녹아있는 행복을 인식할 수 있는 것. 그것이 행복이라고 현재 나는 정의한다. 일상에 불행한 일이, 안 좋은 일들이 가득한 순간에도 역설적으로 행복한 순간이 존재할 수 있음을 난 그 아이로부터 배웠다. 행복한 상태가 행복한 것이지 불행한 일이 없는 상태와 행복은 별개의 일임을 알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망치를 든 사람에게는 모든 게 못으로 보인다는 말처럼 예전의 나는 부정적인 일을 항상 경계하며 살았기에 모든 일이 부정적으로 보였고, 당신은 그 반대였기에 그리도 자주 웃을 수 있는 일상을 가질 수 있었다고 나는 기록했다..
행복을 재정의한다고 해서 갑자기 내 일상이 다이나믹하게 변하진 않았다. 사소한 일에도 웃고, 행복해하는 것은 내가 그 아이를 부러워한 만큼이나 몹시 어려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글을 쓰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계속해서 사소한 행복을 찾는 연습을 하고 있다. 내친김에 오는 2025년의 내 소망은 일상 속 웃는 순간이 더 잦은 한 해가 되기를... 행복에 더 헤픈 사람이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