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살 어느 겨울, 많은 생각과 고민과 감정 사이에 치여 답답한 마음을 덜고자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일기를 쓴 지도 어느덧 6년이 되어간다. 처음엔 그저 넋두리처럼 당시의 감정과 생각을 막연히 써 내려갔다. 매일 일기를 써야겠다는 거창한 각오도 무엇도 없었지만 글을 씀으로써 한결 머리와 가슴이 가벼워졌기에 하루하루 즐겁게 글을 썼다. 지금 다시 보면 서툰 필체로 쓰인 미숙한 글이었지만 당시엔 나만 간직하고 있던 나의 감정을 나만의 필체로 풀어낸 글이 퍽 좋았다.
그렇게 하루하루 쓰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으나 일기는 단지 그날의 있었던 일을 나열하는 것이 아닌 그 순간의 감정과 깨달음을 풀어내야 한다는 강박이 생겼다. 혹자는 굉장히 어이없게 볼 수도 있겠으나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타인과 다를 바 없는 그저 평범한 일상을 적는 것보다는 나의 생각을 적어야만 오롯한 나의 글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이 단지 편견이었을 뿐 그 생각이 나쁜 생각은 아니었다. 그렇게 일상의 일들보다는 일상 속에서 느낀 것들을 위주로 글을 매일 쓰면서, 쓰면 쓸수록 점점 나에 대해 잘 알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글 역시 쓰면 쓸수록 점점 내 문체는 선명해져 갔고, 글을 쓰는 힘도 강해졌다.
그러나 해가 거듭되니 새로이 느끼거나 기존에 적지 않았던 감정과 깨달음들이 점점 줄어들어갔다. 또한, 내가 글에 공을 들이면 들일수록 스스로 더 잘 써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을 스스로 만들고 느꼈다. 그러다 보니 매일같이 빼곡히 채워지던 일기장은 날짜와 계획만 덩그러니 놓인 채 계속 쌓여갔다.
어느 날 밤 문득 일기가 쓰고 싶어 일기장을 열었다 빈 공백들을 보고 조소가 나왔다. 그저 마음이 편해지고자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인데 이젠 나를 옥죄는 감옥이 된 이 아이러니한 상황이 웃겼기 때문이다. 그 후 찾아온 생각은 굳이 그럴 필요가 있었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영원히 생생하게 기억날 거 같던 기억들도 희미해지고 있는데 그저 그 희미해져 가는 기억의 편린을 기록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의미가 있지 않나. 꼭 일기라는 것이 굳이 의미가 있어야 하나. 세상 그 어떤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한 글인데 의미와 잘 쓴 것이 무슨 큰 의의가 있나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나의 쓸모없는 아집으로 나의 소중한 기억들을 그저 흘려보내고 말았다. 그저 자기만족일 뿐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