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어도 버텼던 회사와 작별인사 한 이유
귀국 후 첫 직장과 이별한 지 어느덧 일주일이 흘렀다.
작년부터 밥 먹듯이 "그만두고 싶다" 생각하면서도 상사와의 충돌, 상호존중이 턱없이 부족한 임원진들, 그리고 열악한 스타트업 근무환경을 전부 악착같이 버텨낼 수 있었던 원동력은 내 욕심이었다. 열악한 환경일수록 내 능력을 배로 발휘할 수 있을 거라는 긍정적인 욕심. 온 김에 하나라도 더 나의 재산으로 만들겠다는 욕심.
하지만 이 욕심은 예상한 것보다 빨리 채워졌다. 아니, 한계에 부딪쳤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 같다. 그동안 미루고 미뤘던 퇴사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시점은 내가 이곳에서 더 이상 얻을 게 없다고 느꼈을 때였다. 백수를 바라보는 곱지 않은 시선 때문에, 수입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배움이 없는 곳에 남아있는 것은 나 자신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곳에 계속 남았다가는 나의 불행을 타인의 탓으로 돌리는 게으르고 부정적인 사람이 될까 봐 두려웠다.
퇴사 의사를 밝히기 6개월 전부터 퇴사 사유를 여러 번 정리해봤다. 그냥 너무 힘들어서 그만두는 게 아닌지, 힘든 상황을 견딜 끈기가 부족해서 도망치는 게 아닌지 확인하고 또 확인해보았다. 반전은 없었다. 무려 15년의 해외 생활 후 한국에서의 첫 직장에 쉽게 적응 할리 없었다. 힘들었다.
하지만 나는 힘들다는 이유만으로 절대 이 회사를 나가지 않기로 자신 만과의 약속을 맺었다. 힘들어도 스타트업은 전공 분야에 구속되지 않은 채 마음껏 새로운 도전에 뛰어들 수 있는 곳이니까. 이렇게 힘들어야지 정치학 출신인 내가 더 넓은 시야로 세상을 관찰할 수 있으니까. 이 마음가짐으로 나는 정말 무서운 속도로 급성장할 수 있었고, 회사가 그토록 바라던 성과를 하나둘씩 이루어 내었다. 반면 회사는 미흡하고 틀에 박힌 운영 방식과 경쟁사 전략을 모방하는 독창성 없는 모습만 보여주었다. 직원들의 조언을 무시한 채 콧대 높은 임원진들은 회사의 수많은 약점들을 방치해 두었고, 이런 환경에서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성장의 한계가 있음이 명확해졌다. 그 시점부터 마음을 굳게 먹었다. 배울 수 있는 건 다 배우고 미련 없이 떠나자. 떠나서 나의 도전 정신을 활활 불태워 줄 곳으로 가자.
그렇게 나는 목표가 생기고 나서야 회사와 이별할 준비가 되었다. 퇴사 예정 날 2달 전부터 내가 다음에 지원할 회사들에 대한 정보를 꼼꼼히 수집하고 자기소개서와 이력서를 다듬기를 시작했다. 물론 넘쳐나는 회사 업무량 때문에 준비에 소홀해진 적도 많았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는 항상 명확한 최종 목적지가 그려져 있었다. 어쩌면 내가 아직 어리기에, 무모한 도전 정신 덕에 꿋꿋하게 높은 곳을 바라볼 수 있었던 것 같다. 내가 꿈꾸는 회사는 면접이 4차 5차까지 있을 정도록 최고들의 최고의 인재들만 뽑는 세계 우수 회사이다. 그만큼 나는 자기소개서, 면접과 필기시험 준비에 더욱더 많은 투자를 하고 싶었고, 배움이 제한돼있는 직장을 붙들며 내 계획 실천을 더 이상 미루고 싶지 않았다.
나는 다음 목표가 확실해지고 나서야 현실적이며 안정적인 퇴사를 할 수 있으리라 안도했다. 퇴사는 탈출구가 아닌, 더 나은 나를 향한 징검다리이기 때문이다.
다음 목표가 여행이 될 수도 있고, 대학원이 될 수도 있고, 이직이 될 수도 있다. 나에게는 이직이라는 목표가 있고, 이 변화가 어떻게 나의 2년 후, 혹 5년 후 성공에 기여할 수 있는지 여러 번 되짚어 봤다. 다른 말로 나의 목적, 'why to do'를 명확하게 찾아내었다.
나의 why to do는 단순한 도망이 아닌, 경험 많은 상사와 열정 넘치는 월드 클래스 동료들 사이에서 비즈니스에 대한 경험과 지식을 넓혀가는 것이다. 내가 지망하는 회사는 사람과의 만남에 최적화된 커뮤니티이기에, 그곳에서 얻는 인간관계 및 대화능력과 대처능력은 나의 재산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내가 원하는 사업을 기획하는 당당하고 독립적인 여자가 되기 위한 하나의 소중한 단계이고. 내 목표가 확실한 만큼, 나는 그 목표에 대한 자신감과 자부심을 가졌기에 깔끔하게 퇴사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목적을 구체화시키면서 나의 목표의 실행 방안이 더 쉽게 보이게 되고, 공백 기간 동안 단순한 백수가 아닌 아닌 목적지를 향해 달리는 착실한 기획인이 될 자신이 생겼다.
물론 모든 일이 잘 풀릴 거라는 근거 없는 거만함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다. 걱정이 1도 안 된다고 하면 새빨간 거짓말이다. 이직 활동을 위해 피나는 노력이 필요한 점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고, 결과는 어느 정도 내 노력에 비례할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 퇴사, 이 변화가 내가 앞으로 나아가는데 필수적이라는 것에 확신을 가지고 있고, 주변에서 뭐라 해도 안 흔들릴 자신이 있다 (물론 부모님께서는 말로는 응원해주시면서 종종 걱정 가득한 한숨을 쉬긴 하신다). 그래서 나는 최대한 흔들리지 않고 내 앞에 있는 문 제를 하나씩 해결하려고 한다. '그래. 지금 나에게 주어진 문제는 뭐고, 내가 실천할 수 있는 일은 뭐지?' 매일 나에게 이 질문을 던지며 to-do list를 만들어나가고 있다. 내 마음만큼은 이미 나의 꿈의 회사에 가있고, 마치 그 회사에 다니는 것처럼 관련 책과 기사들을 읽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보고, 도움이 될만한 스킬을 배우고 있다. 이 배움 과정을 꾸준히 반복하면 어느 시점에서부터 나의 무의식도 다음 직장에 걸맞은 형태를 갖추게 될 거라 믿는다. 어쩌면 남들이 보기에는 과하게 긍정적인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내 대답은 이런 도전의 순간에 나조차 나 자신을 믿지 않고, 실패가 두렵다고 부닥쳐 보지 않으면 영원히 'comfort zone'(안주 지대)에 가쳐있을 처지라는 것이다.
퇴사도 어느 인생의 딜레마처럼 A를 포기하는 대신에 B를 얻는 기회이다.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는 어느 정도 마음먹기에 달렸기에 '기회'라고 하고 싶다. 다음 징검다리에서 어떤 가치를 창출해 낼 것인지 미리 생각해보고 실천 방안을 구체적으로 정리해놓으면 퇴사 후 자유시간이 그 무엇보다 의미 있는 자기 계발의 시간이 될 거라 믿는다.
누구한테도 쫓기지 말고, 사회의 기대치에 발맞추려 조급해하지 말고, 온전히 나의 목표로 인해 움직이자.
나의 꿈을 제일 소중하게 여겨줄 사람은 나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