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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셀린 Nov 16. 2019

내가 뱃살이 어딨니

1610

항상 씩씩하고 털털한 모습의 그녀였습니다. 막 독립한, 그야말로 방금 잡은 횟감처럼 싱싱한 신규 간호사의 뒤를 이어 무지막지한 업무를 떠안아도 단 한 번도 얼굴을 찡그리거나 쓴소리를 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땐 다 그런 거다, 태어나서 이만치 욕먹은 적도 없을 테니 나까지 하지는 않겠다, 밥은 먹고 일하는 거냐고 토닥거려주기까지 했습니다. 한편 입에 불길이 나오는 것 같은 무서운 올드 간호사가 무자비한 소리를 퍼붓고 말도 안 되는 강짜를 부려도 그 앞에서는 주눅 들어있다가 돌아서면 다시 쌩쌩해지는 그녀였습니다. 저런 사람도 있는 거야, 모두가 착하면 그것도 참 재미없는 인생일 것이야, 하고 속으로 삭히며 깨끗하게 씻어내곤 했습니다. 당연히 환자들에게도 늘 따뜻하게 대했죠. 그래서 친절 간호사의 타이틀은 항상 그녀의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병동을 사랑했고, 병동도 그녀를 사랑했습니다.


그런 그녀가 최근 고민이 생겼습니다. 뱃살이 몰라보게 늘었던 것입니다. 병동에서 특수복을 입으면 앞으로 늘어진 뱃살 때문에 등까지 조여 오는 느낌이었습니다. 한 치수 큰 것을 입으려니 뭔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녀는 원래 살이 잘 찌는 체질이었어요. 그나마 관리를 해서 평균 몸무게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먹고 싶은 것이 열 개라면 세 개 정도는 참아낼 수 있는 인내심 덕택이었습니다. 빨간 양념에 윤기가 흐르는 치킨이 먹고 싶다가도 어차피 내가 아는 맛이다, 라며 생수를 들이켜고 잠들어 버릴 수 있는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그녀에게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모 프로그램에서 파스타 순례를 하는 것을 목격하고야 말았던 겁니다. 아아, 그녀의 자물쇠가 사뿐히 열렸습니다. 판도라의 상자를 욕을 하면서 스스로 기쁘게 열고야 말았습니다.


데이 근무가 끝나고 잠실로 나가 눅진한 풍미의 크림 스파게티를 먹었습니다. 건조한 삶이 풍부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다음 날은 천호동에서 마늘 가루가 잔뜩 뿌려진 것을 먹었습니다. 해장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이튿날은 이브닝이었는데, 근무를 마치고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가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물을 끓이고 면을 삶고 토마토소스를 얹어 멋들어진 뽀모도로를 먹었습니다. 다음 날은 거기에 체다 치즈를 잔뜩 추가했습니다. 노란 광채의 그것은 혀까지 녹여 버리는 맛이었습니다. 오프 날은 맘 잡고 경리단길의 정통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찾아가서 또 다른 세계를 경험하고 왔습니다. 봉골레는 조개만 먹고도 살 수 있을 것 같은 영원성을 느끼게 하였고, 송로버섯 가루가 살짝 뿌려진 오일 스파게티는 천국에 풀밭이 있다면 당연히 이 향기가 넘쳐 날 것이라는 확신을 주었습니다. 그만큼 파스타의 스펙트럼은 넓고도 환상적이었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황홀한 동화의 나라 한가운데에서 늘 주문을 외웠습니다. 파스타는 주 재료는 통밀이라고 한다. 그러니 살이 찌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최화정이 라디오에서 그랬다. 맛있게 먹으면 0칼로리라고. 나는 몹시 맛있게 먹으니까 오히려 미이너스 칼로리일 것이다. 당연히 주문은 주문일뿐, 애먼 통장만 마이너스가 되었고 뱃살과 몸무게는 하루가 다르게 플러스가 되어 버렸습니다.


얼굴이 좋아 보인다고 어떤 간호사가 그랬습니다. 멋쩍게 웃어넘겼습니다. 조금 살집이 있는 편이 주름도 안 보이고 혈색이 좋아 보이는 거야, 나는 어쩌면 이 편이 더 나았던 것일지도 몰라. 그리고 미국에서 이 정도면 스키니 한 몸매야. 하지만 이곳은 냉정한 한국이었습니다. 기어코 독설가인 올드 간호사가 한 마디 거듭니다. 쪘네, 쪘어. 혼자 뭘 그렇게 먹고 다닌 거야. 저도 모르게 얼굴이 찌푸려집니다. 입사 이래 단 한 번도 내보이지 않은 표정이 나옵니다. 다들 흠칫 놀랍니다.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공격이 들어갑니다. 쟤가 팔다리가 얇아 그렇지 딱 보니 4kg 쪘네, 분명 상체비만형이라 얼굴이랑 배만 쪘을 거야. 따지고 보면 진실만을 내뱉는 것일 텐데도 너무나도 미운 그녀입니다. 맨날 혼자 먹으러 간 건 아니에요, 두 번은 동기랑 갔어요, 그리고 3.7kg 쪘거든요? 라며 죽도록 항변하고 싶습니다. 펴지지 않은 그녀의 미간에 분위기가 엄숙해졌습니다. 제정신을 차려야 했습니다. 이런 공기는 그녀의 스타일이 아닙니다. 매끈하게 마무리를 해야 합니다. 애써 눈웃음을 짓습니다. 다행히 하던 가락이 있어 무리 없이 미소를 지을 수 있었습니다. "에이, 제가 뱃살이 어딨다고 그러세요, 호호" 하고 뒤돌아 섰습니다. 그때 무엇인가 탁 터지며 후련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것이 마음의 안식인가, 지는 게 이기는 것이라는 명언의 효력인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정말로 목 뒤가 거짓말처럼 시원해졌습니다. 하지만 인생이 그렇죠, 뭐. 안타깝게도 터진 것은 마음이 아니라 특수복의 등 뒤로 잠그는 녹색 단추였습니다. 야무지게 여며 놨었는데 기어이 명을 달리 한 것이었습니다. 하필 병동 내에 그렇게 울려대던 알람도 딱 멈추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핑 하고 날아가 탁 하고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렸습니다. 등 뒤의 누구도 웃지 않았습니다. 아니, 웃을 수 없었겠지요. 과연 그녀는 모르는 척 계속 걸어가야 할까요, 푼수를 떨면서 분명히 약하게 꿰매져 있었을 단추 탓을 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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