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셀린 Nov 16. 2019

신사의 품격

1808

그를 목격한 것은 비즈니스 좌석이 즐비한 구역이었다. 하늘색 스트라이프가 정갈하게 새겨진 셔츠를 입고 주름 하나 없는 슬랙스에 갈색 로퍼, 심지어 그 안에 우아한 회색 양말까지 이 날씨에 곱게 신고 있었다. 영문이 즐비한 소설책을 읽으며 은색 안경을 중간중간 만지는 것은 긴 비행길에 긴장한 제스처처럼 보였지만 찬찬히 보니 원래 있던 버릇 같았다. 독서에 집중하는 그에게 승무원이 조심스레 말을 걸면 그는 승무원의 입술에서 떨어지는 단어를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단정한 눈빛으로 경청을 하고는 이렇게 답을 하였다. 


‘그렇다면 저는 2013년 산 그 아이스 와인으로 할게요.’


그와 나 사이엔 한 커플이 있었다. 남자는 깃을 세운 감색 폴로셔츠에 반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가슴팍의 엠블램과 깃에 수놓아진 문양이 참으로 화려하였다. 미간에 인상을 쫙 찌푸린 채 벌써부터 디너는 언제 나오냐고 승무원을 보채었다. 하잘 데 없는 부침을 받은 승무원은 이런 부류와 상황은 익숙하다는 듯 시원한 시냇물이 흐르듯 답했다. ‘비행기가 이륙하면 최대한 빨리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메뉴판은 지금 바로 갖다 드릴게요.’ 그러고 뚜벅뚜벅 내걷는 발걸음엔 전혀 주눅 들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그 와중에 그 남자의 여자 친구로 보이는 여자(얼굴 전체가 빵빵한 것이 본인의 맘에 안 드는 부위 전부를 필러로 채운 모양이었다. 3만 피트까지 비행기가 이륙하면 터질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는 단 한 번도 폰에서 눈을 떼지 않고 그 남자에게 되물었다. ‘그래서 언제 저녁 준대? 우리 라면도 갖다 달라고 하자.’ 그러고는 의자를 발라당 눕히더니 에어컨 바람이 춥네, 좌석이 등에 배긴다네 등의 소릴 해대며 자꾸만 그를 보채었다. 역시 그 밥에 그 나물이었다.


승무원은 그 커플에게 와인 리스트와 메뉴판을 주고 내 쪽으로 넘어왔다. 이륙 전 식전주가 필요하냐고 물어왔다. 작은 소리로 답했다. ‘저 쪽 남자분이 시키신 아이스 와인으로 주세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승무원은 갑자기 활짝 웃으며 알겠다고 했다. 그 와인은 자기도 좋아하는 것이라며 매우 훌륭한 선택이라고 했다. 그렇게 기분 좋게 돌아서는 승무원을 되돌린 것은 역시 그 커플이었다. 남자는 흔하디 흔한 싸구려 맥주(뭐, 맛있을 수도 있겠다. 취향 나름이니까)를 시켰고, 여자는 영화가 볼 게 없다고 했다. 승무원은 드라마는 어떠시냐며 리스트를 갖다 준다고 했다. 여자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난 미드 아니면 안 봐요!’ 승무원이 곧바로 응수했다. ‘미드도 꽤 준비되어 있습니다. 리스트를 갖다 드릴게요. 맥주도 같이 서빙하겠습니다.’ 하며 총총걸음으로 커튼 뒤로 사라졌다. 여자는 뭐라 중얼대더니만 수면 안대를 착용하고 잠들 준비를 하며 말했다. ‘자기야, 밥 나오면 나 깨워줘.’ 


이륙을 하고 식사가 나왔다. 타다끼처럼 익힌 등심 스테이크와 비트 주스, 병아리콩 수프를 선택했다. 식전 주로 택했던 아이스 와인은 꿀물을 발효한 듯 달콤하며 혀 뒤로 농밀하게 넘어가더니 포도 덩굴 냄새가 부비동에 황금색으로 진하게 남아 있었다. 엄청나게 충격적이었다. 내가 여태 마셔왔던 와인은 대체 무슨 액체였을까. 와인이 원래 이렇게 우아한 맛을 가지고 있는 음료였음을 처음 느끼게 해 준 술이었다. 다시금 그의 선택에 찬사를 보내며 그를 바라보았다. 마침 그도 매력적인 검은 수소처럼 킁킁대며 와인의 향을 내뿜는 중이었다. 그 커플은 비빔밥을 시키더니 반도 먹지 않고 라면 하나씩 추가하더니 두 입 정도만 먹고 죄다 버려달라고 말했다. 남자는 맥주 한 캔을 더 시키고 여자는 대뜸 화장을 고치더니 다시 수면 안대를 쓰고는 벌렁 누웠다. 


모든 불이 꺼졌다. 나는 잠이 오지 않아 개봉 시기를 놓쳐 보지 못했던 ‘블레이드 러너 2049’를 보고 있었다. 평소 흠모하던 드뇌 빌뇌브의 세세한 미장센에 한창 감탄하고 있는데 비행기가 갑자기 흔들렸다. 벨트를 매라는 경고등이 켜졌고 동시에 그의 좌석 쪽에서 놀라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보니 얼굴이 능금처럼 벌게진 스튜어디스가 그의 옆 좌석에 있던 외국인에게 연신 사과를 하고 있었다. 와인을 치우는 과정에서 비행기가 흔들리며 엎어진 모양이었다. 심지어 레드 와인이 외국인의 드레스 셔츠를 물들인 것 같았다. 그는 그 사이에 끼어 양쪽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스튜어디스는 사과를 이어가며 물수건으로 좌석과 식탁을 닦았다. 멀리서도 셔츠의 얼룩이 점점 번지는 것이 보였다. 남 일 같지가 않아 눈을 뗄 수는 없었다. 도와줄 수 있는 것도 없었다. 그때 소란스러움을 눈치챈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사무장이 나타났다. 인자한 부처처럼 외국인에게 다가가서 무슨 일인지 물었다. 외국인은 어깨를 움츠리며 당황스럽다는 모션을 보였도 대신 스튜어디스가 설명을 하려던 찰나 대뜸 그가 나섰다. 


‘제가 잘못 건드려서 와인잔이 엎어졌네요. 죄송합니다.’


핏빛처럼 잔인하고 시큼한 냄새가 분위기는 한순간에 핑크 로제 와인처럼 싱그러워졌다. 사무장은 이미 모든 것을 눈치였지만 그러시냐며 와인이 묻은 곳은 없느냐고 되려 그를 다독였다. 그는 괜찮다고 대신 옆 좌석 분과 스튜어디스가 곤란하게 되었다고 했다. 스튜어디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물티슈를 더 꺼내어 잔여물들을 마저 닦아 내었다. 사무장은 외국인을 일으켜 세워 옷을 세탁해준다며 잠깐 나오시라고 했다. 다행히도 별다른 컴플레인 없이 순순히 따라 나와주었고 항공사 측에서 제공한 웃옷으로 갈아 입고 자리로 돌아왔다. 화장실을 갈 때 준비실을 힐끗 보니 승무원은 그 사이에 벌써 와인 자국을 지우고 셔츠를 빳빳하게 다림질하고 있었다. 하지만 웬일인지 은근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까지도 기분이 좋아지는 표정이었다. 자리로 돌아오며 옆 커플을 보니 기울어진 턱 밑으로 침까지 흘리며 세상모르게 곯아떨어져 있었다. 무언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참 보기가 유쾌하진 않았다. 왜일까. 


드디어 착륙하였다. 어느새 나갈 차비를 마친 그도 일어섰다. 아까 그 승무원이 다가가서 뭐라 말을 건네었다. 무슨 말을 했는지 들리지 않았지만 그는 깜짝 놀라며 연신 손사래를 치며 얼른 자리를 뜨려고 했다. 승무원이 다시 뭔가 물어보았지만 그는 꾸벅 인사만 하고 문을 나섰다. 뒤이어 외국인이 일어났다. 사무장이 따라붙었다. 서로 웃으며 이야기를 했고 승무원은 다시금 가볍게 사과를 하는 듯 보였다. 나도 나갈 준비를 했고 아이스 와인이 참 맛있었고 덕분에 편한 비행이었다는 소감을 전했다. 


 궁금해할까 봐 알려드리자면 그 커플은 비행기가 정지하자마자 마치 변 마려운 개처럼 후다닥 안전띠를 풀고 문 앞에 가서 서 있었다. 승무원은 예의 상 한 번 자리로 돌아가라고 말을 하고는 이내 포기하였다.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15분 정도 그 자리에 대기하다가 가장 처음으로 나갔다. 1등으로 나가다니 정말로 부럽기 짝이 없었다. 입국 절차를 마치고 그 커플을 다시 만날 수 있었는데 뭔가 지나치게 사들였는지 곤란한 표정으로 세관원들 앞에서 가방을 펼치고 있었다.  

작가의 이전글 머리 하는 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