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셀린 Nov 16. 2019

B+

1809

어제 이브닝 근무를 마치고 샤워만 겨우 한 채 젖은 머리로 잠들었다. 어디선가 쿰쿰한 냄새가 난다 했더니 그것 때문이었나. 베개에 냄새가 배었으려나. 어차피 조만간 이불부터 침대 커버까지 모두 세탁하려고 했으니 상관없다. 사실 일단은 귀찮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왼손은 본능처럼 리모컨을 찾는다. 늘 보는 영화채널을 맞추었다. 여자 주인공이 지나치게 사랑스러워서 차마 마주하지 못했던 ‘미 비포 유’의 초반부가 상영되고 있다. 점수로 매기자면 A급 외모로 C급 환경을 살아가는 인생이었다. 오늘은 그 부담을 떨치고 한 번 봐줘 볼까 한다. 시간은 오전 열 시 이십 분. 배가 고팠지만 아직 속이 쓰릴 정도는 아니니 무시해보기로 했다. 와, 여자 주인공이 노랗고 검은 줄무늬의 호박벌 바지를 좋아한다고 한다. 취향 한 번 독특하다. 스타일이 없는 것보다 차라리 천박한 스타일이 낫다고 코코 샤넬이 남긴 말이 생각난다. 그래, 저 정도면 넓게 봐줄 수 있어. 


1부가 끝났다. 시한부 인생의 끝을 스스로 준비하는 과정이라. 과연 아름다울 수 있을까. 어쩌면 그럴 수 있다고 영화는 말하고 있다. 스스로 원해서 태어난 사람은 없지만 어떤 경우에는 사람답게 죽는 것은 누구나 선택할 수 있다. 주체적인 죽음은 사람을 살리는 것만큼 가치가 있을지도 모른다. 늘 시커먼 그림자를 업고 일하는 업을 가진 자로서 잔잔한 공감이 일어났다. 그래도 드는 이질감은 있었다. 수염을 내버려 두어도, 사지가 마비된 채 침대에서 숨만 쉬어도 잘생길 수밖에 없는 주인공과 그의 재력 때문이었다. A+였다.


 말끔하고 향기 나는 환자는 세상에 없다. 저 모습은 돈이 넘쳐나는 사람이니까 우아하게 인생의 스위치를 내릴 수 있는 것이었다. 결국 돈인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배가 더욱 고파졌다. 2부가 시작하기 전까지는 광고가 펼쳐질 테니 십여 분의 시간이 남아있었다. 뭔가 섭취할 수 있는 시한부 같은 타이밍이었다. 갈색 반점이 반쯤 뒤덮은 바나나와 유통기한이 이틀 정도 남은 흰 우유를 꺼내고 초코시럽도 찬장에서 꺼냈다. 투명한 블렌더에 다 쏟아붓고 갈아댔다. 달콤한 흙탕물처럼 검어지며 건더기 없이 깔끔하게 갈릴 내용물을 생각하니 조금 비싼 돈 주고 이 블렌더를 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A급인 물건이었다. 역시 돈인가. 커다란 머그를 꺼냈다. 걸쭉한 액체를 옮겼다. 이것은 이름하야 초코 바나나 셰이크인 셈이다. 소중한 양식을 들고 TV 앞으로 갔다. 소파에 몸을 던지고 까슬까슬한 이불을 끌어안았다. 영화는 곧 시작했다. 아차, 블렌더를 한 번 헹구고 왔어야 했는데 이미 늦어버렸다. 


주인공은 깔끔하게 생을 마감했고 덕택에 여자 주인공은 유학을 가서 패션디자인을 공부하게 되었다. 그들 사이에 자식 같은 것은 없었지만 적어도 외롭게 죽는 것은 아닌 셈이었다. 공짜로 유학 보내준 사람을 평생 어떻게 잊을 수 있느냔 말이다. 결국 돈이었구나, 하는 쓰잘 데 없는 결론을 내는 와중 중환자실을 거쳐갔던 사람들이 생각의 옆구리를 비집고 들어왔다. 바로 어제, 이제는 더 해줄 수 없는 의학적 수단이 없던 11번 환자가 생경하게 떠올랐다. 아마도 오늘을 넘기긴 힘들 것 같았다. 가족들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직 의식은 있었기에 최대한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 맞는 것 같았다. 체위변경 같은 것은 이미 무의미했다. 굵은 모질의 수염에 비누칠을 하고 깨끗하게 밀었다. 환의의 주름을 폈다. 베갯잇을 갈았다. 하얗고 보송한 반 시트를 새로 꺼내어 덮었다. 이 정도가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환자가 아닌 사람으로 대하고 싶은 최소한의 배려였다. 조심스레 인계를 주고 퇴근을 하였다. 버스 안에서도 그 자리가 떨쳐지지 않았다. 평소보다 고단했었다. 아아, 그 때문이었나. 어제 시체처럼 잠들었던 이유가. 


술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샤워도 하고 싶었다. 오늘 쉰다고 했던 병원 친구가 떠올라서 메시지를 넣어두고 좋아하는 비누항이 나는 샤워크림을 꺼냈다. 피지와 잡념들을 거품과 함께 말끔히 씻어내고 싶었다. 내일은 나이트 근무다. 뒤쫓기지 않는 하루가 될 것 같다. 거울을 보니 왼쪽 볼 한가운데 여드름이 자리를 잡고 있다. 에잉, 나중에 짜버려야지. 따뜻한 물을 틀었다. 정수리부터 발가락까지 내려가는 물줄기가 간지러웠다. 까슬해서 기분 좋았던 소파 위의 이불, 영양학적으로 단단했던 나의 간식, 괜찮았던 영화, 아직은 여유 있는 하루를 떠올리며 샤워를 하다 말고 점수로 매길 궁리를 시작했다. 마침 폰 메시지의 알람이 울렸다. 분명 그 친구일 테지만 애써 확인하지는 않았다. 같이 마실 수 없다면 혼자 마시면 된다. 어쨌든 오늘은 B+인 하루가 될 것이므로. 

작가의 이전글 신사의 품격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