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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셀린 Nov 16. 2019

머리 하는 날

1806

스스로 커트를 한지도 어언 9년 차. 대기에 가습기를 켠 것 같이 습하던 어느 날, 트리머에 잘리며 등과 가슴팍에 들러붙는 머리카락의 잔해들이 지겹더라. 오랜만에 전문가의 솜씨를 느껴보고 싶어 졌다. 자르다 말고 샤워를 하고 검색을 하기 시작했다. 


미용실 어플에는 멋진 헤어스타일만 즐비했다. 그다지 차별점이 없어 보였다. 하긴 내가 미용사라도 최상의 사진을 업로드해서 손님을 끌겠지. 그리하여 미용사 자체의 프로필 사진을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남자 미용사는 피했다. 예전 경험상 자신의 헤어 스타일을 강요하는 경향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시도는 대부분 맞지 않았다. 헤어 스타일이란 옷차림과 마찬가지로, 아니 조금 더 깊게 라이프 스타일과 관련이 있다. 나를 나타내는 방식이 외양적으로 드러나는 것 중 가장 두드러진달까. 군인의 머리카락이 짧고 스님이 민머리인 것은 응당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삶의 방식이 비슷해야 서로 원하는 결과물이 엇비슷하게 창출될 가능성이 높다. 아마도 적당히 화려하게 꾸민 미용사가 잘 맞을 것이다. 턱없이 비싼 곳도 피하고 싶었다. 머리카락이 자라는 주기상 2주에 한 번은 들러야 하는데 가격이 높은 곳은 힘들다. 거리도 중요했다. 너무 멀면 발걸음이 잘 안 떨어진다. 삼박자가 맞는 곳을 거의 두 시간쯤 검색했다. 물망에 오른 곳은 세 군데였는데 그중 한 미용사의 닉네임이 ‘제니’였다. 미국에 사는 사촌동생 이름과 같았다. 또한 기쁘게도 한 시간 후의 스케줄이 비어있었다. 당장 자르고 싶었다. 바로 예약을 하였다. 


통통한 몸집에 화사한 메이크업을 한 미용사였다. 아이라인을 깔끔하게 길게 뺀 것이 꽤 프로페셔널해 보였다. 믿음이 솟아났다. 그때 나는 드라이 파마를 한지 얼마 되지 않았었는데 길이가 어중간하여 도저히 수습이 어려웠던 터였다. 말하자면 나름의 ‘거지 존’에서 헤어 나오고 있지 못하던 상태랄까. 몇 달을 고생하며 길렀던 스타일에서 벗어나 앞머리가 툭툭 잘린 크롭컷을 하고 싶었다. 사진을 보여주었다. 아아, 하더니 이 머리하고 나시면 기분 좋아지실 거예요,라고 덧붙이곤 사각사각 가위질을 시작했다. 


거의 5cm 정도씩을 툭툭 쳐내기 시작했다. 전부 자르고 나면 200g쯤 체중이 덜 나갈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구레나룻과 뒷목도 6mm로 깔끔하게 정리했다. 그러곤 물었다. 괜찮으신가요?


아이고, 매우 마음에 듭니다요. 함박웃음이 나는 것을 참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싶은 것을 참고 새침하게 네,라고 대답하였다. 다른 질문이 이어 들어왔다. 손님, 혹시 직업이 패션 쪽이신가요? 왠지 그런 느낌이 들어서요. 아니면 타투이스트? 


그 날 따라 유난히 그런 느낌의 차림새이긴 했다. 거의 어린아이가 들어갈 만한 넓이의 와이드 팬츠에 일본 느낌이 물씬 나는 게다를 신고 아끼던 감색 코트를 걸치고 명품 가방을 들고 미용실에 들어왔으니까(엄마가 백화점과 미용실은 차려입고 다녀야 무시받지 않는다고 했다). 아니오, 아닌데요. 단답으로 응대하고 입을 닫았다. 


보통이라면 여기서 대화가 끝나고 약간의 어색한 분위기 가운데 가위질 소리만 들려야 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머리를 맡기고 수다스럽게 자신의 얘기를 하는 타입은 아니니까. 그런데 이 미용사는 정말 궁금했나 보다. 그럼 실례지만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정말 너무 궁금해요. 


간호사예요. 중환자실에 있어요. 순간 가위질이 멎더니 너무나 크게 웃는 것이 아닌가. 기분 나쁜 웃음이 아니라 너무나 의외성에 나온 것이라 나도 같이 따라 웃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며, 또 남자 간호사는 처음이라며 다시 한번 웃었다. 다시 가위질이 시작되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어머니도 간호사라고 했다. 얼마나 힘든지 조금은 안다고 했다. 그 모습을 생각하니 내 직업이 더 의외라 너무 크게 웃었다며 미안하다고 했다. 그 후로 미용사와 나는 간호사와 미용사의 공통점을 나누고 있었다. 민감한 부분을 우리는 건들죠, 힘든 분들은 정말 힘들어요, 사람들이 너무 쉽게 생각해요, 내내 서있어서 다리가 너무 아파요,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직업이죠. 그렇게 떠들다 보니 어느새 눈썹에서부터 2cm 정도 길이로 앞머리가 사뿐히 잘려 있었다. 오오, 비로소 내가 원하던 컷이었다. 


자리를 옮겨 머리를 감기 시작했다. 몽글몽글 거품이 일어나는 청포도향의 샴푸였다. 항상 환자들의 몸을 닦고 옷을 갈아 입히고 변을 치우다가 막상 그 반대의 입장에서 머리를 맡기자니 기분이 새삼 이상했다. 파마를 할 때는 잘 몰랐는데 커트 후 샴푸는 너무나 오랜만이라 그런가. 아니면 조금 전까지 간호사의 업무를 상상하며 대화를 나누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누군가에 의해 씻겨진다는 것이 이렇게 생소할 줄이야. 미적지근한 물줄기가 시작되었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았다. 굳이 되묻지 않아도 될 온도임을 서로 알아챘다. 자연스러운 침묵 속에 촤라락 촤라락 거품이 씻겨나가고 있었다. 곧 두피에서 뽀득뽀득 소리가 났다. 정말로 개운했다. 커다란 하늘색 지우개로 무언가를 말끔히 지운 느낌이었다. 


바로 출근하시나요? 

아니에요. 오늘 오프고 내일 데이예요. 

그럼 집으로 가시죠? 말려만 드릴게요. 

네, 감사합니다. 


힘차게 미용실 문을 나섰다. 시원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오래간만에 마음에 드는 프로를 만났다. 아마도 미용사와 간호사는 2주 후, 또다시 조우를 할 것이다. 그때 앞머리 기장은 그대로 두고 다른 부분만 다듬어봐야겠다. 분명 찰떡 같이 이해할 것 같다. 어딘가에 맞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이렇게 기분 좋은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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