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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포동 술쟁이 Aug 14. 2017

Day 47. 아프면 고생

와이프 말을 잘 듣자.

잔병은 많아도 큰 병은 없다고 자부하고 살아왔는데...

오늘은 정말 큰일 날 뻔했다. (아니 정확히는 어젯밤부터)


소피아행 야간 버스를 기다리던 도중

등에 담이 심하게 들렸다.


움직이는 것은커녕 숨쉬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터미널에 있는 카페에 짐을 내려둔 후라 그나마 다행이었다.

최소한의 안전은 확보를 한 상태니까...



하지만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고,

진통제는 효과가 없고, 버스시간은 다가오고

직원들은 매장을 정리하며 눈치 주기 시작하고,

앞으로 우리가 타야 할 버스는 심야버스고...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소피아 숙소를 포기하고 여기 호텔을 잡고 쉬어야 하나?

아니 그전에 호텔까지 갈 순 있나?

그럼 짐은 누라가 들어야 하는 건가? 들 수 있을까?


그렇게 전전긍긍하며 경우의 수를 따져보던 도중

불안한 얼굴로 나를 지켜보는 누라와 눈이 마주쳤다.


아... 내가 아프면 안 되는구나...

내가 책임져야 할 것은 저 짐뿐만이 아니구나...


난 바로 진통제 두 알을 목구멍으로 쑤셔 넣었다.

약효가 퍼졌는지 긴장으로 인해 몸의 감각이 둔해진 건지,

짐을 들고 어찌어찌 버스정류장까지는 갔다.


하필 데살로니키 버스터미널은 이렇게 스산하게 생겼다.


버스만 타면 어느 정도 숨을 돌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버스는 지옥행 급행버스였다.


지옥길의 시작...


버스는 우선 가볍게 도착시간 따위는 지키지 않는 것으로 우리를 반겼다. 그다음은 팔걸이... 하필 내 자리의 팔걸이는 박살나 있었다. 일단 버스에 무사히 탄 것에 감사한 나머지 '팔걸이 정도야 뭐'하며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버스가 대관령과 같이 고불고불한 길에 들어선 후부터 문제는 시작됐다. 팔걸이가 없으니 통로 쪽으로 쏠리는 몸을 막아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두 다리와 의자 앞에 있는 손잡이에 의지하며 고불거리는 도로를 버텼다. 엄청난 통증과 함께... 그러다 겨우 직선도로가 나와 잠이라도 들라 치면 등의 통증이 나를 다시 께웠다. 지옥 같은 야간 버스는 그렇게 비 내리는 소피아 터미널에 새벽 5시에 도착했다. 예상보다 4시간이나 일찍 왔다.


"어우 추워."


 버스에서 내리면서 내가 말했다. 그리스의 30도 넘는 더위에 익숙해진 우리에게 17도의 비 내리는 소피아는 굉장히 추웠다. 그리고 어두웠다. 원래 우리는 9시쯤 소피아 터미널에 도착해야 했다. 버스에서 푹 자고, 대중교통으로 호텔까지 간 후 짐을 맡기고 체크인 전까지 소피아를 둘러보려 했다. 완벽한 계획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파서 잠도 못 잤고, 버스는 예상보다 훨씬 일찍 터미널에 도착했고, 날은 추웠고, 유심은 터지지 않았다. 


뭘 어찌할 수 있었을까? 피곤에 아픔에 스트레스까지...

난 바로 환전소로 갔다. 터미널의 환율과 도심의 환율 비교? ATM 수수료 비교? 이 딴 거 다 필요 없었다. 그냥 무작정 숙소로 가고 싶었다. 돈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만 아프고 싶었으니까.


다행히 소피아에 예약한 숙소는 비앤비가 아닌 일반 숙박업소였다. 언제든 숙소로 가면 리셉션 데스크에 직원이 있을 것이다. 따뜻한 로비도... 그곳이 우릴 구원해 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도착한 숙소는 정말 천국이었다. 리셉션 데스크에서 해가 뜨기 전까지 소파에서 좀 쉬어도 되겠냐는 나에게 직원이 말했다.


"음... 아니에요. 지금 마침 오후에 체크인하실 방이 비어있어요. 지금 바로 올라가셔도 돼요."

"네? 하지만 체크인 시간이"

"상관없어요. 방이 비어있는데요 뭐. 많이 피곤해 보이는데 어서 올라가 쉬세요."


이건 뭐지? 초 얼리 체크인인가? 이런 횡제가... 지금까지의 고생을 여기서 보상해 주는 건가?

어찌 보면 1박을 꽁으로 하는 것이었다.

불가리아 사람들 다 이리 친절한가? 눈물이 났다. 드디어 쉴 수 있다. 이제 안 아플 수 있다. 

우리는 바로 방으로 올라가 짐을 풀고는 바로 잠이 들었다. 


잠이 들면서 생각한 건데... 원래 소피아는 숙소 값을 아끼려고 에어비앤비를 고집했었다. 하지만 누라의 강력한 어필로 지금 숙박업소를 예약한 것이다. 근데 만약 비앤비를 했더라면... 지금 우린 아마 터미널 어딘가에 쪼그려 있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남자는 마누라 말을 잘 들어야 하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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