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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포동 술쟁이 Aug 23. 2017

Day 54.  프랑크푸르트에서 온 할아버지

루마니아 브라쇼브


원래 오늘은 시기쇼아라에 다녀온 이야기를 적으려 했다. 하지만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아름다운 시기쇼아라를 방문한 기억보다 더 기억에 남는 일이 잠들기 전에 있었다.


숙소로 들어가던 중 우연히 1층에서 숙박 중인 노부부를 만났다. 가볍게 인사를 하고 지나가는 나에게 할아버지가 말을 걸어왔다. 자신을 프랑크푸르트에서 온 렌스라고 소개한 그는 맥주를 좀 하셨는지 목소리에 취기가 묻어있었다.


“자네 어느 나라에서 왔는가?”

“저 한국이요.”

“당연히 북한은 아니겠지?”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10명 중 9명이 던지는 농담이다. 당연히 남쪽에 있는 한국이라고 답했다.


“지금 여행 중인가? 신혼여행?”

“아니요. 결혼은 2년 전에 했고요. 지금은 와이프랑 세계여행 중이에요.”

“그래? 얼마나?”

“한 300일 정도 예상하고 있어요.”

“300일? 이럴 수가 자네 우리와 한 잔 하지 않겠나?”


그렇게 시작된 술자리에서 나와 렌스 할아버지는 급속도로 친해졌다. 나는 한국 같으면 할아버지에게 이렇게 술을 따라주면 큰일 난다며 주도를 알려주었고 그는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다며 호응해 주었다. 화제가 북한으로 바뀌자 그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당시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장벽이 무너진 직후에는 서독과 동독인들의 차별이 심했다고… 한국도 통일이 된다면 처음엔 힘들지도 모른다고 했다. 하지만 한국도 잘 해결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서울이 궁금하다며 서울에 가면 무엇이 가장 아름답냐고도 물었다. 그 질문에 난 야경이 아름답다고 답했고, 그 야경은 수많은 사람들이 야근을 해서라고 농담반 진담반으로 말했다. 할아버지는 웃었고 나 또한 씁쓸하지만 사실이라며 따라 웃었다. 날씨가 좋아서 인지 렌스 할아버지가 친근해서 인지 술자리가 계속될수록 나는 좀 더 마음속 깊숙한 곳에 있는 이야기를 했다. 택시 사기부터 여행지에서 받은 인종차별이 의심되는 사건 들까지... 그때마다 할아버지는 조용히 내 잔에 와인을 따라주며 내 말을 들어주었다. 깊은 이야기를 할수록 말도 안 되는 영어가 나왔지만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여 주셨다.


“사실 와이프가 회사를 그만두고 얼마 후 다니던 회사가 망했어요.”


왜 여행을 하고 있냐는 렌스 할아버지의 질문에 내가 답했다. 순간 술자리에 정적이 흘렀다.


“아. 그렇게 심각해지지 마세요. 오히려 저에겐 좋으니까요.”


그가 따라주는 와인을 받으며 내가 말을 이었다.


“사실 그때 알았어요. 제가 알고 있는 세상이 너무 좁다는 걸요. 당시에 전 출근하는 아침이 그렇게 싫었으면서도 다시 출근을 하기 위해 다른 회사를 알아보는 것에 아이러니함을 느꼈어요. 그래서 떠나왔어요."

“잘 생각했네, 분명히 얻는 게 있을 거야. 자네 생각보다 세상은 더 다양하고 넓거든.”

“네, 여행은 항상 답을 주니까요.”


우리는 서로의 여행을 위해 조용히 잔을 부딪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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