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글이 늙지 않기 위해서는

글은 재능의 몫이 아니라, 발품의 영역이다

by 라떼파파

작년 12월 브런치에 입성한 후, 작가들의 글을 둘러보면 갓 잡은 활어처럼 팔딱팔딱 뛰는 싱싱한 문장이 지천이다. 노쇠하고 올드한 내 문장과 비교하면 센스 넘치고 기막힌 아포리즘은 감탄사를 자아낸다.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지만, 그중에서도 하늘하늘거리는 봄꽃처럼 유독 마음을 건드리며 유혹하는 글들이 있다.


내가 평소 바라보는 가치와 맞닿은 반가움일 수 있고, 끙끙 앓던 고민의 솔루션을 발견한 기쁨일 수도, 때론 가지지 못한 천부적 재능에 대한 부러움일 수도 있다. 그런 글들은 나뿐만 아니라 많은 작가에게도 공감의 벽을 타고 입소문이 전해진다. 출판사에서도 호시탐탐 그들을 노리다, 급기야 출간 작가로 신분 상승(?)하는 예고된 대박을 이끈다.




관심작가 중 한 분의 글은 텍스트로 읽히는 질감이 영락없이 젊고 매혹적이다. 발랄하고 톡톡 튀는 단어와 문장이 온몸의 감각을 흔들어 깨운다. 그러다 환갑을 지났다는 수줍은 고백의 문장을 발견하곤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트렌디한 문장의 구성과 쏟아지는 청춘의 은유에서 도대체 어딜 봐서 초로의 세월을 보냈다는 건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물론 연륜을 녹인 글이 '숙성'이란 이름표를 달고 화려하게 선보이지만, 그런 글들 역시 '세월의 주흔'을 부정하기 어렵다. 단어와 문장에서 토해내는 오랜 강박이 무서운 법이라 시간을 거스르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글은 자신의 결핍을 포함해 모든 것을 드러내는 민낯과 같아, 섣불리 변화를 주는 데 주저하기 마련이다. 물론 김훈, 故박경리, 황석영 작가처럼 본인의 스타일이 반영된 글이 세간의 넓은 사랑을 받지만, 우리가 그들이 될 수 없음은 자명하다.


결국 그 대척점에서 '글이 늙지 않는다'는 것은 이른바 자신의 아집과 고집을 접고 타인을 향해 공감과 이해의 글을 쓰기 때문이다. 요즘 유행에 섬세하게 반응하면서도, 자신만의 사유를 양념처럼 흩뿌리며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균형감을 살린다. 흘려보내기 쉬운 글감을 알뜰히 챙기며 한 편의 멋진 글로 승화시키는 이들을 보면 글은 반드시 재능의 몫이 아니라, 세밀한 관찰력에서 비롯된 발품의 영역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예전 글쓰기 합평에서 '노화'를 지적받은 적이 제법 있었다. 삶의 구체보다 추상을 적시하며 괜스레 '있는 척'하는 만용이 앞섰기 때문일터. 현학에서 길어 올린 글의 모호성이 공감보다 짜증을 자아냈음은 당연하다. 그러면서 느낀 것은 글은 쭉정이의 화려함이 아니라, 속이 꽉 찬 '진정성'이 중요하다는 사실이었다. 글이 '늙지 않다는 것' 역시 이와 결을 함께한다. 탱탱하면서 윤기가 좔좔 흐르는 '젊음의 글'은 진정성을 양분으로 관찰과 공감과 이해의 텍스트가 더해질 때 빛난다. 늘어나는 얼굴 속 잔주름은 어쩔 수 없어도, 나 역시 글만큼은 '노화'의 흔적을 지우고 이팔청춘의 푸르름을 더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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