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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떼파파 Jul 23. 2021

나는 철이 덜 들었다

철없는 삶을동경하며

두 달 전이었다. 나른함이 잦아드는 오후 4시 무렵. 핸드폰에 대학 친구 B의 이름이 떴다.


"어제 Y, J, K랑 술을 마셨는데, 네 이야기가 나와 오랜만에 전화했어."

"얘들은 잘 지내고? 보고 싶네 다들."

"연락 좀 하고 살아라. 너 빼고 다들 잘 지내지. 어제 얘들이 한 이야기의 핵심은, ‘넌 철이 덜 들었다’는 거."

"엥, 뭐야? 철이 덜 들었다고... 내가 왜?"

"흥분하지 마. 좋은 의미야. 넌 나이에 안 맞게 아직 세상 보는 눈이 순수하다는 뜻이니까."

"... 그래? 그거 괜찮네."


"철이 덜 들었다"는 말에 잠시 분기탱천했다가, 진의를 알면서 마음이 누그러졌다. '참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도감이 들었고,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사실 타인의 일방적 잣대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인성의 결괏값이 매겨지고, 급기야 도매급으로 넘어가 이러쿵저러쿵 입방아에 올려지면 분노 게이지가 급상승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번에 '때가 덜 묻었다'니, 45살 중년에 이런 횡재가 어딨나 싶다. 사실 살아온 세월만큼 철이 덜 들지는 않았을 테고, 다만 철든 티를 덜 냈을 뿐이다. 그쪽 세계(철든 세상)에 편입하고 싶은 마음이 없거나, 무의식적으로 밀어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몇 년 전 직장 야구 동호회였던 한 선배와 진중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언뜻 '사내정치'가 화제가 되었고, 우린 팽팽하게 의견이 갈렸다.

 

"너도 알겠지만, 사내정치는 꼭 필요해. 네게 힘이 되어주는 사람. 다만 흐름과 분위기를 봐가며 강약 조절이 필요하단다."

"선배님, 사실 저는 모르겠습니다. 사내정치라는 것이 득 보다 실이 많은 것 같아요."

"물론 그럴 수 있지만, 사내정치 없이 회사에서 버티기는 힘들어."

"그렇지만, 전 흙탕물 속에 들어가긴 싫습니다."


사실 회사생활을 하다 보면, '라인(Line)'에 관한 이야기가 빈번하게 쏟아진다. 안테나를 세워 정보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들 대부분이 사내정치에 발을 담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제조업은 특성상 노동조합의 입김이 워낙 강해, 그쪽으로 연을 대는 관리자들도 부지기수다. 그만큼 악취가 진동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간혹 언론에 노조의 비리가 대서특필되지만, 그 이면엔 일부 관리직의 업무 배임이 버젓이 자리하고 있음을 안다. 그들만의 리그가 워낙 견고하다 보니, 밖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 그러다 보니 능력이 밥을 먹여 주지 않는다. 사내정치를 혐오하는 이유 중의 하나다.  




결혼 초 와이프와 말다툼을 하다 자주 듣는 이야기 중 하나가 "‘착한 척’ 좀 하지 마라."였다. 처음에 왠지 억울했고, 어안이 벙벙했다. 왜 진심을 몰라주느냐고 읍소도 했지만, 본심과 달리 정황은 '착한 척'으로 귀결됐다. 요즘에도 그런 말을 들으면 이렇게 받아친다. "나, 평생 '착한 척'하면서 살 거야."


그러다 이번 글을 쓰면서 그 ‘정황’에 대한 의문이 조금은 풀렸다. 나는 ‘착한 척’을 하지 않았다고. 다만 남들과 달리 말과 행동의 꾸밈이 서툴고 엉성하다 보니, 이런 부분들이 본의 아니게 오해로 다가간 게 아닐까 하고. 시간이 지나면 진심을 알아주겠지라고 확신(?)했지만, 여전히 반신반의 중이다. 억울하지만 언젠가 남편의 마음을 이해할 날이 올지도.  

 



세상은 나에게 '눈치가 없다, 물정을 모른다, 실속부터 차려라'는 말로 진심을 왜곡하고 순수를 구속한다. 억하심정으로 반발도 해보지만, 부질없다는 점을 안다. 숨김없는 ‘순수’가 지배하는 세상을 꿈꾸는 이유다.


회사에서 줄곧 암묵적 모임을 피하는 편이다. 유아독존이 아니라, 그 에너지를 가정과 자기 계발에 쏟기 위해서다. 복마전의 중심인 부서에 있어 봤지만, 나중에 남는 건 '인간'이란 민낯의 저열함과 비열함이었다. 어디까지가 바닥인지 목도하는 것, 겪어보면 그런 세상은 꼴도 보기 싫다. 퇴사를 앞둔 몇몇 선배들의 한결같은 일갈은 내가 지향하는 믿음과도 일치했다. “모두 다 쓸데없고 필요 없어. 그 소중한 시간에 너 자신과 가정에 충실하는 것이 남는 거야. 너를 포장하면서 조직에 너무 얽매거나 기대지 마.”


친구들이 나를 떠올릴 때 ‘철이 덜 들었다’며 오해(?)하는 것. 결국 그런 전형적 삶의 세파 속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본능적 기제 때문이 아닐까. 그것이 은연중 행동으로 표출되고, 꾸밈없는 언어로 발설되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이리저리 눈치 보며 피곤하게 살고 싶지 않은 점도 한 몫한다. 그런 편법과 속임과 날림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뭐가 그렇게 복잡한지. 있는 그대로 믿고 있는 그대로 행동하는 것이 그리 잘못일까. 이상한 법칙으로 이상한 프레임에 엮으려는 세상의 잣대에 반기를 든다. 스스로를 속이고 싶지 않다. 그런 철이 덜 든 세상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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