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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떼파파 Dec 17. 2020

눈부신 추억

눈이 가져온 뜻밖의 선물

# 나의 눈


13일 함박눈이 내렸다. 일요일 모처럼 늦잠을 청하려던 찰나, 아내가 이불을 걷고 일으켜 세운다. 5살 아들에게 '눈'을 선물하잔다. 전날 늦게 잠이 들었던 터라 피곤함이 가시지 않았다. 내심 집콕을 원했지만, '아이를 위한다'는 불문율에 천근만근 몸을 이끌고 밖을 나선다.  


오랜만에 보는 설경은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땅과 나뭇가지와 잔디밭에 소담하게 내려앉은 눈은 세상을 하얗게 탈바꿈시켰다. '와, 펑펑 내리는 눈은 정말 오랜만이구나...' 영하 5도를 오르내리던 날씨에 대비해, 우리 가족은 외투, 목도리, 장갑 등으로 중무장하며 눈밭 속으로 뛰어들었다.


두꺼운 옷에 못 이겨 뒤뚱뒤뚱거리며 앞서가는 아들 모습은 흡사 아기 오리 같았다. 지난달부터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오는 날만 학수고대하고 있다. "나쁜 아이는 선물을 안 준다"는 에 엄포(?)에 어찌나 말을 잘 듣는지, 귀여움이 폭발할 지경이다. 아들은 고사리 같은 손으로 눈부터 매만진다. 동화책에서 그림으로 보다 직접 실물을 마주하니 신기한가 보다. 손이 시린 줄도 모르고, 한참 동안 눈과 아이(eye) 컨택하기 바쁘다.     


나는 수북이 쌓인 눈부터 쓸어 모아, 두 주먹만큼의 눈덩이를 만든다. 그리고 바닥에 굴리며 몸짓을 키우기 시작한다. 눈 뭉치는 금세 불었다. 또 다른 눈 뭉치까지 단숨에 만든 다음, 두 개를 아래 위로 이어 붙인다. 눈사람 완성. 아이를 위한다고 시작했지만, 정작 즐기는 건 나 자신이다. 몸이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눈 뭉치를 굴리고 눈사람을 만드는 원초적 재미가 이렇게 쏠쏠할 줄이야. 눈과 어우러진 어릴 적 동심이 완벽하게 빙의했다. 40대 중반에 이런 감격스러운 순간이 찾아오다니, 찌뿌둥했던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 옆에서 지켜보던 아들은 연신 물개 박수다. "아빠, 내가 솔방울 하고 나뭇가지로 눈사람 눈과 손을 만들 거야."


아침밥 대신 빵을 공수해서 먹자는 아내의 제안이 날아들었다. 우리 가족은 사방팔방 흩날리는 눈보라를 등지고, 15분 거리에 있는 제빵점까지 발걸음을 재촉했다. 도로 곳곳이 미끄러운 탓에 아들은 연신 균형을 잃고 이리 쿵 저리 쿵이다. 넘어질 때마다 어찌나 자지러지게 웃던지, 아들은 놀이처럼 즐긴다. 다칠까 봐 노심초사했지만, 이것도 추억이려니 생각하며 아이 손을 붙잡기 바쁘다. 인적 없는 한산한 도로 위에는 여섯 개의 발자국이 선명하다. 그 족적이 신기한지 아들은 한 걸음씩 뗄 때마다 체중을 실어 눈 위에 신발을 꾹 눌러 붙인다.


"발자국 만드는 게 그렇게 재밌어?"

"응, 재밌어. 아빠. 하하하"


나란히 찍힌 아들과 나의 발자국이 떼려야 뗄 수 없는 동행의 표식처럼, 형언할 수 없는 전율이 덮친다.


함박눈이 쏟아진 일요일 오전, '눈'이라는 자연 소품만으로 가족 웃음이 동시에 공명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감사했다. 아이에게 추억을 선물하기 위한 아내의 ‘빅피처’에 고맙다. 시간이 지나면 빛바랜 기억으로 남겠지만, 앞으로 쏟아지는 눈을 볼 때면 얼마든지 추억 소환이 가능할 것이다. 유통기한 없는 예쁜 추억으로 말이다.




# 아내의 눈


오늘따라 남편이 늑장이다. 새벽마다 운동한다고 그렇게 부산을 떨더니, 오늘은 왠지 늦잠을 감행할 태세다. 코로나로 다니던 어린이집까지 관둔 마당에 주말에 일찍 일어나 아이와 놀아주면 좀 좋냐며 핀잔을 퍼붓고 싶다. 외출할 일이 극히 드물고, 집에만 갇혀 살다 보니 나도 아이도 여간 답답한 게 아니다. 때마침 눈이 펑펑 내린다. 남편을 흔들어 깨워 문밖을 나섰다.


뾰로통하던 표정이 어느덧 신난 얼굴로 바뀐 남편을 보니, 꽤나 눈이 반가웠나 보다. 연신 즐거운 표정을 지으며, 눈사람을 만든다. 아이도 직접 눈을 보고 만지다 보니 뭔가 색다른 경험을 하는 듯했다. 답답했던 마음이 조금은 숨통이 틔는 것 같아 다행이다. 부지런 떤 것은 대성공. 나는 휴대폰으로 부자의 모습을 프레임에 담으며,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인다.


밥솥에 밥이 없어, 운동을 겸해 빵집에 가자고 했다. 평소라면 15분이 채 걸리지 않는데, 눈길에 미끄러지며 가다 서다를 반복하니 어느덧 곱절의 시간이 걸린다. 앞선 걸음을 재촉한 내 모습 뒤로 남편과 아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서로 발자국 놀이에 한창이다.


오랜만에 보는 눈. 함박눈이 쉴 틈 없이 대지 위에 내려앉는다. 가족의 사랑도 쉴 틈 없이 스며든다. 따뜻한 하루다.   



# 아들의 눈


어제 일찍 잠든 탓에 7시에 일어났다. 아빠는 한창 꿈나라에 있다. 엄마는 씻는다고 한창이다. 거실에서 타요와 폴리 장난감을 가지고 한참을 놀던 순간, 엄마가 창가에서 부른다.


“율아 이리 와 봐. 눈이야 눈”

“응? 눈? 와... 진짜네....”

“아빠랑 같이 밖에 나갈까?”

“그래 좋아”


눈을 직접 만지니 시리고 차갑다. 아빠는 뭐가 신났는지 눈사람 만들기에 여념이 없다. 손재주가 썩 좋지 않은 것 같은데, 이번에도 기대하진 않는다. 그래도 눈사람 비슷한 뭔가를 만들어낸다. 아빠가 무안할까 봐, 나는 나뭇가지와 솔방울을 주워 눈사람을 완성한다. 엄마는 옆에서 연신 “김치”라고 부르며, 사진 찍기 바쁘다.


빵집에 가는 길이 어찌나 미끄럽던지 엉덩방아를 수없이 찍었다. 처음엔 당황했는데, 두꺼운 옷 탓에 별로 아프지 않았다. 양발로 용케 버텨보려고 했지만, 넘어지기를 반복한다. 아빠는 손을 내밀어 도움을 주지만, 정작 넘어지는 데서 오는 재미가 줄어든다.


발자국 찍기 놀이도 신난다. 마치 하얀 ‘눈 도화지’에 발자국을 콕콕 찍는 것 같아 재밌다. 아빠도 옆에서 따라 한다고 난리다. 허당끼 넘치는 아빠지만, 그래도 믿고 갈 수밖에. 열심히 사는 모습이 꽤나 멋스럽기 때문이다.


눈으로 가득한 세상을 실컷 맛볼 수 있어 행복한 하루다. 그나저나 마스크는 언제쯤 벗어던질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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