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서울 인근에
경기도 북부 지역에 다다랐다.
이상하게 여기서부터는 인적이 드물었다.
간혹 폭격으로 담장이 무너진 집들이 보였다.
버려진 신문지와 깡통이 바람에 나뒹굴고 있었다.
스산했다.
묘한 긴장감과 두려움이 몰려왔다.
나는 귀를 쫑긋 세우며 걸어갔다.
혹시라도 무슨 이상한 소리가 들리면, 가까운 골목으로 숨어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한참을 걸은 끝에 숲이 우거진 다른 마을 어귀에 다다랐다.
마을 속으로 들어갔다.
마을 중앙에는 나이가 수백 년은 되었음직한 커다란 정자나무가 있었다.
나무의 몸통은 장정 여럿이서 에워싸야만 할 정도로 육중했다.
거침없이 하늘로 뻗은 가지가 마치 대장군의 위용처럼 느껴졌다.
오래된 나무에는 신령스러움이 깃들여있는 듯했다.
나무를 지나쳐갈 때 이상하게도 강한 전율을 느꼈다.
마치 나무에 정말로 목신(木神)이라도 살고 있는 것처럼, 그 목신(木神)이 지나가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느낌이 들었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자 시끌벅적 풍악소리와 군중들의 환호소리가 들려왔다.
잔치가 벌어진 것 같았다.
가지런히 담장이 둘러쳐진 큰 기와집이 유독 눈에 띄었다.
눈에 띄기도 했지만 왠지 익숙했다.
대문 가까이 갈수록 왁자지껄 소리는 높아졌다.
웃고 떠드는 소리를 보아하니 안주와 술상이 넘치도록 차려진 것 같았다.
이상했다. 전쟁통에 이 작은 마을에서 이 정도 규모의 잔치를 벌이다니 말이 되나 싶었다.
커다란 안마당, 사랑채, 안채, 대청마루... 척 보기에도 뼈대 있는 가문의 부유한 집 가옥으로 보였다.
남녀노소, 아이어른 할 것 없이 온 동네, 아마 이웃 마을 사람들까지 다 몰려온 것 같았다.
집 안 밖이 사람들로 빼곡했다. 마당에는 돗자리가 깔려 있었다. 술과 전과 어육들. 일하는 사람들은 술과 안주, 음식을 내어 나르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빽빽한 사람들 틈에서 간신히 행랑채 한구석에 자리를 구해서 앉았다. 행랑채에는 대중없는 남자들로 꽉 차있었다. 대낮이었지만 벌써부터 얼큰한 막걸리 냄새가 물씬했다. 더불어 남자들의 땀냄새가 진동했다. 약간 머리가 지끈했다. 사람들은 정치, 전쟁, 역사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나로서는 워낙에 관심밖의 일이어서 그들의 논쟁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다만 책장에 꽂힌 책들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그때, 집안사람인지 하루 고용한 인력인지는 모르겠으나 둥글고 앳된 얼굴의 여자가 나타났다. 여자는 배시시 웃으면 혼자 오셨냐고 물었다. 시장하시죠, 잠시 기다리시면 곧 전과 술을 가져다 드리겠다고 했다. 나는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것을 보고, 천천히 주셔도 된다고 답했다.
이 집에 무슨 경사스러운 일이 있나 봐요?
사령관님이 오셨어요. 총사령관님.
여자는 짧게 말하고, 싱긋 웃으며 사라졌다.
총사령관?
그제야 창문 너머로 안채를 살펴보게 되었다. 안채 뒤편으로는 양복과 군복 입은 체격 튼튼한 남자들이 둘러 서 있었다. 경호원과 군인들 같았다. 모르긴 몰라도 대단한 지위를 가진 사람인가 싶었다.
술상을 기다리며 가만히 집안의 가구와 서적을 살펴보니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익숙했다. 너무 익숙했다. 가구의 배치, 눈에 익은 책 제목들, 창문과 문, 대들보, 문지방 등 방구석구석의 구조. 순간 어떤 생각이 내 뇌리를 쳤다. 이곳은 바로 나의 외갓집이었다. 외할머니 집이었다. 너무 어렸을 때 가보고서는 바쁘다는 핑계로 오랫동안 뇌리 속에서 잊혔던 그곳이었다.
울컥하는 심정과 함께 이런 생각이 몰려왔다. 사령관, 총사령관이라는 사람이 여기를 점령하고 잔치를 벌이고 있다면 그럼 외할머니와 외갓집 식구들은 다들 어떻게 된 것일까? 의구심과 불길한 예감이 교차했다. 갑자기 들이닥친 총사령관 휘하 군인들에게 포박당하여 차마 상상하고 싶지 않은 무슨 변고라고 당한 것일까. 음식을 나르고 있는 사람들이나 대청마루에 앉아있는 사람들의 얼굴은 낯설었다. 비록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아무리 뜯어봐도 외갓집 식구들은 아니었다. 속단하지 말자고, 차분해져야 한다고 나의 이성은 소리치고 있었지만, 감정은 어쩔 수 없이 두려움과 공포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개다리소반에 편육과 전과 술 호리병을 내 앞에 두고, 행랑채에서 바삐 나가는 여자의 짙은 눈썹 모양에서 외갓집 식구 특유의 생김이 떠올랐다. 확신할 수 없었지만 어쩐지 약간 마음이 놓였다.
이어서 궁금해졌다. 전쟁이 끝난 것일까. 총사령관이라는 사람이 승전한 것일까.
사람들 틈에서 가만히 귀동냥해 들어보니 전쟁이 확실히 끝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새로운 총사령관이 부임했고 그가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전에 여기에 잠시 머물 임시 거처를 마련했다고. 오늘 잔치는 총사령관의 지시로 마련된 것이라고 했다.
나는 총사령관이라는 사람이 궁금해졌다. 그의 입성이 외갓집과 우리 집안에 도움이 되는 일인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전쟁 중에는 어느 쪽 편에 서는 냐에 따라 집안 식구들 전체의 목숨이 달려있었다. 한 순간의 선택이 생사를 가르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총사령관에게 잔치를 하도록 외갓집 전체를 내어준 일이 잘된 일인지 아닌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물론 지시를 거절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중에 전세가 역으로 기울어지면 큰 화를 입을 수도 있을 것 같았기에 심리가 편안하지는 않았다.
그때 마침 웅성웅성 소리가 들렸다. 잔칫상을 차려놓은 대청마루에서 총사령관과 그의 참모진들이 일어나서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대청마루와 안마당, 사랑채, 행랑채에 앉아있던 모든 사람들이 일어났다.
나는 사람들 머리 틈으로 간신히 비집고, 그 총사령관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맙소사. 그는 이번 유력 대선 주자 중의 한 명이었다.
그 꿈으로부터 3개월 후 그는 내 앞에서 한 손을 들고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 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
나는 서울역에 있었다.
TV 모니터에서 새로운 대통령이 취임 선서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