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나만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어느 틈엔가 구급차와 119 대원들이 도착해 있었다. 119 대원들은 모여있는 몇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물어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째빠르게 남자가 갇힌 튜브 슬라이드로 향했다. 튜브 슬라이드 외관을 두들겨 소리를 냈다. 그 안에 갇힌 거구의 남자와 서로 두들기는 소리로 소통하기 시작했다. 남자가 갇힌 위치와 상태를 대략 파악을 한 것 같았다. 때마침 앵글 그라인더를 든 절단사가 등장했다. 그는 짧은 반팔 검정 티셔츠에 고글을 쓰고 있었고 어깻죽지가 우람했다. 대원들의 설명을 듣자마자 한치의 머뭇거림 없이 그라인더로 튜브 슬라이드를 절단내기 시작했다. 하얀색 시퍼런 금속성 불빛이 사방으로 튀기 시작했다. 절체절명의 순간인데 이상하게, 화려하게 튀어 오르는 불빛 조각이 아름답게 여겨졌다. 마치 여름밤 불꽃놀이 같았다. 잠시 황홀경에 빠졌다. 하지만 곧 저렇게 거침없이 절단하다가는 슬라이드 안에 거구의 남자까지 썰어버리는 것 아닐까 하는 걱정이 엄습했다.
절단된 터널 튜브 슬라이드에 두꺼운 손과 발이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앵글 그라인더가 불꽃을 튀며 두 동강 이를 내려는 찰나를 찍은 사진이 삽시간에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방방곡곡을 넘어 국경 너머로 퍼져나갔다. 사람들은 자극적인 장면에 쉽게 흥분한다. 공포스러워하면서, 혐오스러워하면서 동시에 그와 같은 장면에 사로잡힌다. 파손되어 연기가 모락모락 올라오는 튜브 슬라이드 배경으로 피부색과 언어가 각기 다른 리포터들이 실시간 상황을 지구촌 곳곳으로 알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분노로 들끓었다. 과체중 몸무게 직원에 대한 배려와 고려가 전혀 없는 회사 측, 제대로 된 안전장치와 안전요원도 없이 튜브 슬라이드를 출근 방식으로 선택한 고위 경영진의 성급한 결정, 노동조합이 없는 회사에서 지도층의 일방통행적인 결단. 과체중 직원에 대한 고려가 없는 부실한 터널 튜브 슬라이드 설치에 대한 성토가 이어졌다.
여기까지 기록하다가 과체중이란 단어가 마음에 걸렸다. 일반적인 평균 체중보다 많이 무게가 나가는 것을 과체중이라고 하는 것일 텐데 왠지 편향적인 용어처럼 보였다. 과체중이라면 평균적이지 않다는 뜻으로 해석되어 듣는 이로 하여금 차별감이나 불쾌감을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어 보였다. 그래서, 아래부터는 과체중이라는 용어 대신에 체질량지수가 상대적으로 높은 직원으로 고쳐서 적어보기로 했다.
체질량지수가 상대적으로 높은 남자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족히 120킬로그램은 넘어 보였다. 아마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결성된 모임인 것 같았다. 수는 점점 불어나고 있었다. 50여 명... 금세 1백여 명으로 광장을 메꾸었다. 장관이었다. 체질량지수가 상대적으로 높은 남자들이 거친 스타일로 갈겨쓴 투쟁. 단결. 집결. 뭔가 과격한 구호들이 판때기에 쓰여있었다. 물론 말끔하게 프린트를 하여 가지런한 타이포그래피체로 된 시위 패널을 흔드는 시민도 있었지만 대개 눈길을 끈 것은 거친 손글씨로 휘갈겨 쓴 굵은 글씨체 패널이었다. Big Size Beautiful.
어느새 로비에 있던 직원들의 대부분도, 물론 나를 포함하여 이 시위대에 동참하고 있었다. 웅성 웅성하던 소리가 찰나였고, 땅이 울릴듯한 고함소리 외 외침, 쇠뭉치 두들기는 소리와 함께 매캐한 연기가 솟아올랐다. 터널 슬라이드를 올라타고 사람들이 플래카드와 패널을 흔들었다. 누군가는 쇠몽둥이로 튜브 슬라이드를 힘껏 내리쳤다. 그 장면을 유튜버들이 다투어 생중계를 하고 있었다. 가지런하게 대오를 갖춘 기동타격대가 방패를 들고 시위 중인 사람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쇠망치와 쇠파이프로 튜브 슬라이드를 찌그트리던 남자들이 동작을 멈췄다. 남자들은 기동타격대를 바라보았다. 얼굴은 굳어있었다. 일순 긴장감이 흘렀다. 기동 타격대까지 동원되리라고까지는 미처 생각을 못한 것 같았다. 그때, 남자들 사이에서 누군가 쇠파이프를 기동 타격대 쪽으로 날렸다. 마치 그것인 신호탄이라도 되는 듯 퍼퍼펑펑 소리와 함께 시뿌연 최루탄 연막이 터졌다. 우아아 하는 소리와 함께 남자들이 쇠뭉치와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기동타격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분노의 함성을 뒤로하고, 나는 뒤돌아 섰다. 기동타격대 청년들도 상부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것일 텐데
기동타격대 청년들을 향해 쇠파이프를 던지는 것이 합당한 분노 표출 방식일까 의문스러웠다. 다른 방식으로의 대응이 필요하다. 상위 차원의 힘을 갖지 못한 자들끼리 저 차원의 물리적인 충돌로 무엇을 해결할 수 있을까.
튜브 슬라이드가 설치된 위치는 회사 빌딩 앞마당이었다. 정확히는 마당이 아니라 넓은 공터 광장 같은 곳이었는데 평상시에는 오고 가는 시민들과 학생들이 지나가는 곳이었다. 내 생각에 왠지 이 땅이 회사 소유는 아닐 것 같았다. 이런 경우 보통은 지자체 소유 토지이기도 하다. 다만, 카페나 상점들이 마치 자기 땅인양 거기에 파라솔과 의자를 비치하고 이용객들이 이용하도록 하겠지. 그렇다면, 관청에 철거 요청 민원을 넣어볼까 생각이 들었다. 물론 구청 토지가 아닐 수도 있겠지만. 일단 구청 토지라면 구청 권한으로 철거 가능할 것 같았다. 그러면 적어도 문제 한 가지는 해결되지 않을까.
나는 노동조합의 결성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회사는 무노조였다. 사측의 방해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직원들의 무관심 때문이었는지 창사 이래 무노조 상태를 견지해 왔다. 이제는 노동조합이 결성되어야 할 시점이라고 판단되었다. 노동조합을 구성하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 좀 해봐야겠다. 우선 노동조합 결성에 찬성하고 주도적으로 동참할 인물들을 그려봐야겠다. 세상은 사람이 바꾸는 것이니까.